인도적 요청 무산 사례 만들어 미국 제재 '비인도성' 부각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이란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해 국제사회에 공개적으로 자금과 의약품, 의료 장비를 요청하면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이란 지도부가 미국의 강력한 경제·금융 제재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 경제'와 '이슬람 혁명 정신'을 국시로 내세우며 어느 정부보다 자립, 자주적 정책을 추진한 점을 고려해보면 지원 요청은 사뭇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란 정부는 지난 12일 국제통화기금(IMF)에 코로나19 방역과 치료에 필요한 긴급 자금 50억 달러(약 6조4천억원)를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란은 세계은행, 이슬람개발은행,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DB),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제개발펀드에도 코로나19 퇴치자금을 지원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이란 경제부는 "각 금융기구가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하는 정부의 노력을 돕는 긴급 계획을 마련했다"라며 "이란이 중동에서 코로나19 피해가 가장 큰 곳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라고 강조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최근 문재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코로나19 검사키트 320만개를 보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란의 한 외교 소식통은 "이란 정부가 한국뿐 아니라 의료산업이 발달한 유럽권 여러 국가에 검사키트 등 의료용품을 요청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이란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표면적으로는 이란의 코로나19 위기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급박하고 이란의 의료 체계가 취약하다는 방증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정치적인 해석도 함께 나온다.
사실상 미국이 통제하는 IMF,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 금융기구에 이란이 '숙제'를 던졌다는 것이다.
이들 금융 기구가 이란에 거액의 긴급 자금을 지원하기로 한다면 달러 지폐를 보내지 않는 이상 미국이 이란과 국제사회의 전산상 금융 거래를 허용해야 한다.
이란이 이 자금으로 외국의 의약품과 의료장비를 수입하려 해도 미국이 이 거래를 제재의 예외로 인정해야 가능하다.
미국은 의약품과 같은 인도적 품목은 대이란 제재의 예외라고 주장하지만 금융 제재 탓에 수출 대금을 받기 어려워진 외국의 의료·제약 업체가 이란과 교역을 사실상 중단했다.
미국 정부가 유럽과 인도적 물품 교역을 담당했던 이란 시중 은행을 제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란에서 의약품과 의료장비가 부족해졌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런 이유로 이란이 전 세계적 코로나19 대유행을 이용해 앞으로도 인도적 금융·물품 거래가 미국의 제재에 저촉되지 않도록 실제 사례를 만들려 한다고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IMF 등이 이란에 대한 인도적 자금 지원마저 거절한다면 이 금융 기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미국이 국제사회의 비판에 놓이게 된다.
이란을 불신하는 미국으로서는 이란 정부가 수십억 달러 규모의 지원금을 코로나19 대처에 온전히 사용할 지 용처마저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이 "IMF와 IMF이사회는 설립 취지를 온전히 지켜 역사의 옳은 쪽에 서서 책임있게 행동해야 한다"라고 촉구한 것도 미국의 이런 난처한 지점을 간파한 발언이다.
미국에 크게 영향받는 IMF가 정치적 이유로 이란에 차별적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자리프 장관은 14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 보낸 편지에서 "이란이 전염병에 제대로 맞설 수 있도록 유엔은 대이란 제재를 철회하라고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자렛 블랑 카네기국제평화기금 선임연구원은 23일 블룸버그통신에 "버락 오바마 정부는 이란을 제재하면서도 인도적 지원을 위한 길을 터주려고 유럽과 아시아에 담당자를 보내 제재 예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명확히 설명했다"라며 "현 미국 정부는 그 반대로 인도적 지원에 겁을 줬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는 국제기구가 (이란을 지원해도)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이란은 코로나19 위기에 대처하면서 국제사회를 향해 미국의 '비인도적 대이란 제재'가 이란의 의료 체계를 저해한 탓에 이란 국민의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미국 책임론'을 알리는 여론전에 총력을 기울이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익명을 요구한 테헤란의 정치평론가는 23일 연합뉴스에 "한국 등 미국의 대이란 제재에 예민한 정부가 이란을 쉽게 지원하지 못하는 것을 이란도 잘 안다"라며 "그런데도 이를 요청한 것은 의료용품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설사 무산되더라도 미국 제재의 비인도성을 증명하는 실례로 삼겠다는 이란의 정치적 계산이 깔렸다고 봐야 한다"라고 해설했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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