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굶주림과 범죄, 폭동…중남미서 코로나보다 무서운 것들

입력 2020-04-19 07:07   수정 2020-04-21 15:04

[특파원 시선] 굶주림과 범죄, 폭동…중남미서 코로나보다 무서운 것들
생계 위기 몰린 비공식 노동자들, 감염 위험 무릅쓰고 생업 이어가
상점 약탈 등 범죄 증가 우려…한계 내몰린 서민 폭동 걱정도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춰서자 한 손엔 세제가 든 스프레이를, 다른 손엔 걸레를 든 남자가 부지런히 달려온다.
보통 차 안에서 고개를 내저으면 그대로 지나가는데 이번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앞 유리창을 순식간에 닦는다. 창문 틈으로 건넨 동전을 받아들고는 신호가 바뀌기 전에 서둘러 인도로 달려갔다.
차도 사람도 줄어든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거리를 마스크도 쓰지 않고 열심히 누비는 그는 멕시코의 수많은 '비공식(informal) 노동자' 중 한 명이다.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들에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리는 것보다 일을 못해 끼니를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
빈곤율이 높고 빈부격차가 심하며 치안이 불안정한 곳이 많은 중남미 지역에선 지금 싸워야 할 적이 코로나19만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의 배고픔, 사회 불안과 함께 늘어날 수 있는 범죄, 한계에 몰린 이들이 벌일 폭동 등이 모두 걱정거리다.

멕시코의 경우 비공식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60% 가까이에 달한다.
'무차차'(muchacha)로 불리는 가사 도우미, 길에서 타코를 파는 노점상, 거리의 악단 마리아치까지 통계 밖 '지하경제'에 종사하는 이들은 무수히 많다.
기업에 고용된 이들은 코로나19로 사업장이 폐쇄돼도 고용주와의 합의에 따라 일정 임금을 받지만,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공식 노동자들은 일이 끊기면 곧바로 소득이 끊긴다.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최저임금이 하루 123.22페소(약 6천250원)인 멕시코 노동자들에게 '예금'이나 '여유 자금'은 '유니콘'만큼이나 허황된 단어다.
멕시코에선 3월 한 달에만 13만 명의 공식 노동자들이 실직했다.
코로나19 위기가 길어질수록 일거리를 잃은 이들이 생계의 위협에 내몰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위기가 길어지고 사회가 불안정해지면 범죄가 늘어날 것이 걱정이다.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등 중남미 곳곳에서 코로나19 격리 이후 살인율 등이 낮아졌지만, 격리가 길어지면 범죄가 오히려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멕시코시티에서 명품 매장과 고급 음식점 등이 몰려있는 마사릭 거리엔 문을 닫은 매장들이 유리 벽 밖으로 나무나 금속판을 덧댔다. 아예 매장의 진열품을 모두 빼놓은 곳들도 있었다.
도심에서 의류, 액세서리를 파는 한인 중 일부도 정부 명령에 따라 가게 문을 닫는 동안 물건을 외부 창고에 옮겨두기도 했다.
누군가가 유리를 깨고 가게로 쳐들어와 물건을 훔쳐 갈 것을 대비한 것이다.
EFE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23일과 4월 6일 사이 멕시코시티에서만 상점 절도범 79명이 붙잡혔다. 멕시코의 낮은 범죄 검거율을 고려하면 실제 발생한 절도 사건은 더 많을 것이다.
멕시코시티 바깥 멕시코주에서는 수십 명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모의한 후 슈퍼마켓과 백화점을 약탈하기도 했다.
멕시코 민간 보안업계 관계자는 EFE에 "범죄가 분명히 늘었다. 기회주의자 범죄자들이 코로나19 위기를 이용해 절도와 약탈을 하고 있다"며 당분간 상황이 더 악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사태 초기엔 범죄자들이 코로나19로 인적이 드물어진 틈을 타 범죄를 저지른다면 나중엔 한계에 몰린 보통 사람들이 절망감에 폭동과 약탈을 일삼을 수도 있다.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와 일을 해도 물건이나 서비스를 살 고객이 없고, 어쩔 수 없이 손 놓고 배를 곯다 보면 대책 없는 정부를 향해 불만을 쏟아낼 것이다.
강제 격리 조치가 이어지고 있는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선 최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냄비를 두드리며 빈곤층에 대한 정부의 지원 부족에 항의했다.
콜롬비아 메데인에선 사람들이 거리를 막고 트럭에 실린 지원 물품 약탈을 시도하기도 했다.
잃을 것 없는 서민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나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 중남미 많은 국가가 아마도 가장 두려워할 코로나19 시나리오다.
이 때문에 여러 중남미 국가가 빈곤층 붕괴를 막기 위해 애쓰고 있다.
조속한 경제 정상화를 주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코로나19보다 경기 침체가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최강대국 미국조차 코로나19 국면에서 '보건'과 '경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는데 경제 위기가 곧바로 많은 이들의 생존 위기가 되는 중남미 국가에선 그 고민이 더 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mihy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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