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제형사재판소 인사 제재…미군 전쟁범죄 의혹 조사에 반발(종합)

입력 2020-06-12 02:51  

미, 국제형사재판소 인사 제재…미군 전쟁범죄 의혹 조사에 반발(종합)
경제제재·입국금지 행정명령…외신 "독일·영국 등 제재 가능성 열어둬"
EU "ICC 존중해야, 심각한 우려"…트럼프 '국제기구와 불화' 또다른 사례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전쟁범죄 의혹 조사를 허가한 데 반발해온 미국이 11일(현지시간) ICC 관계자 제재와 입국금지 카드라는 초강수를 꺼내며 ICC를 압박했다.
AP통신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아프간 전쟁과 관련해 미군과 정보 요원들의 전쟁범죄 가능성을 조사하는 ICC 인사들에게 경제적 제재와 여행 제한을 승인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 행정명령은 국무장관이 미국 요원의 조사나 괴롭힘, 억류에 직접 관여한 ICC 인사의 미국 내 금융 자산을 차단하고 이들과 가족의 입국을 막을 수 있도록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처우에 관한 ICC 조사 가능성도 이번 조치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ICC 검찰의 파투 벤수다 검사장은 2003년 이래 아프간에서 벌어진 탈레반의 대규모 민간인 살상, 아프간 당국과 미군, 미 중앙정보국(CIA)의 포로 고문 등 범죄 의혹 조사를 추진해 왔다.
ICC는 지난해 4월 이를 기각했지만 지난 3월 항소심에서 조사를 허가했다. ICC 검찰이 처음으로 미군의 전범 의혹 조사를 허가받은 것이었다.
벤수다는 2017년 법원 제출 자료에서 미군이 2003~2004년 최소 54명의 억류자에게 강간, 고문, 잔혹행위를 했고, 폴란드와 루마니아, 라트비아에 있던 CIA 요원들도 최소 24명에게 이같은 행위를 했다는 믿을 만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본부를 둔 ICC는 전쟁·반인도적 범죄 등을 저지른 개인을 심리·처벌할 목적으로 2002년 설립됐으며,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123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 북한 등은 회원국이 아니다.
해외 전쟁터에 파견한 군인이 많은 미국에서는 ICC가 전범 등 혐의로 미군이나 관료들을 정치적으로 기소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초당적으로 존재했다.
미국은 그동안 벤수다의 미국 비자를 취소하는 등 제재를 위협하며 강하게 압박해 왔다. 미국은 ICC 회원국이 아닌데다 자체적으로 전범을 처벌하는 만큼 ICC가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블룸버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행정명령이 제재를 가할 ICC 인사의 명단을 더 넓힌 것이라며 ICC 활동에 자금을 지원하는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동맹국을 제재할 가능성도 열어 둔 것이라고 평가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미국의 외교·안보 책임자들은 이날 별도의 기자회견을 열어 ICC를 강력 비난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ICC가 인민재판식인 '캥거루 재판'을 진행한다고 비판했고, 에스퍼 장관은 미군이 그동안 전세계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며 그 대상국으로 한국도 언급한 뒤 "불법적 조사를 용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윌리엄 바 법무장관은 "러시아 같은 외국 세력이 그들 자신의 어젠다를 추구하며 ICC를 조종하고 있다"며 러시아도 겨냥했다.
케일리 매커내니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에서 "ICC 검찰의 최고위급에서 부패와 위법행동이 있다는 강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과 인권단체에서는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유럽연합(EU)의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대표는 이날 "ICC는 모든 나라의 존중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며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고 오는 15일 EU 외교장관 화상 회의 때 이 문제가 논의될 수 있다고 밝혔다.
국제인권감시단체인 휴먼라이트워치는 "ICC 공격은 아프간이든, 이스라엘이든, 팔레스타인이든 심각한 범죄의 피해자들이 정의를 찾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AP는 이번 조치가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기존의 국제기구와 협정, 합의에 대한 공격 중 가장 최근의 일로 기록된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파리 기후변화협정, 이란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항공자유화조약(Open Skies Treaty·OST), 러시아와 맺은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에서 탈퇴했다.
또 유엔 산하 인권이사회와 유네스코에서 탈퇴한 데 이어 세계보건기구(WHO)와 관계를 끊겠다고 공언하고 만국우편연합(UPU)에서도 빠지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황이다.
jbryo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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