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합의 위기 '책임전가 대결' 속 비밀 핵시설 의혹 사전 차단
서방 언론 "새로운 원심분리기 시설 노린 사보타주" 주장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2일(현지시간) 새벽 이란 중부 나탄즈의 핵시설 단지에서 일어난 화재와 관련, 이란 원자력청(AEOI)은 같은 날 신속하게 현장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했다.
나탄즈의 '샤히드 아흐마디 로션 핵시설 단지'는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가 7.5m 깊이의 지하에 설치된 곳으로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 따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사찰하는 곳이다.
보안이 민감한 시설에서 불이 난 사실을 이란 정부가 먼저 언론에 알리고, 불과 수시간 뒤 그 현장을 공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미국 등 서방이 주목하는 핵시설 단지 안에서 사고가 난 만큼 이를 두고 서방 언론이 위성 사진과 전문가의 추정을 근거로 이란의 핵활동에 대해 제기할 과잉된 의혹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로 풀이된다.
공교롭게 서방이 핵시설로 의심하는 파르친 군기지 주변에서 가스탱크가 크게 폭발한 지 일주일 뒤 나탄즈 시설에서 불이 나면서 이들 두 사건을 연결 지으려는 해석이 나오는 상황도 AEOI가 현장을 즉시 공개한 배경으로 해석된다.
AEOI는 화재 사실을 공개하면서 '지상에 공개된 시설이며 창고로 쓰려고 공사 중인 건물'이라고 강조했다. 이 화재를 '우연한 사고'라고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방 언론이 이란이나 북한의 핵프로그램에 의혹을 제기할 때 자주 쓰는 '비밀 지하 핵시설'이 아니라는 점에 방점을 둔 것이다.
공개된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AEOI가 밝힌 것처럼 불이 났다는 건물은 길이가 긴 단층의 벽돌로 벽을 세운 평범한 창고 형태다.
이란은 지난달 26일 파르친에서 가스탱크가 폭발했을 때도 같은 날 국영방송을 통해 사고 현장을 신속히 공개했다.
실제로 미국 AP통신은 2일 이란 전문가 2명을 인용해 이날 화재로 나탄즈에 신축한 원심분리기 생산 시설이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구체적인 증거나 정황은 제시하지 않았다.
또 경첩이 떨어진 문과 파편을 근거로 단순 화재가 아닌 폭발이 먼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익명의 전직 이란 관리가 "나탄즈 핵시설은 2010년 컴퓨터 바이러스 공격(스턱스넷)을 받은 곳이고 얼마 전 파르친에서 폭발 사고가 난 만큼 (이스라엘 등이 감행한) 사보타주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의문의 폭발과 화재'라면서 "AEOI가 공개한 사진만으로는 지하 시설이 얼마나 파괴됐는지 알 수 없다. 초기 근거를 볼 때 사보타주로 강하게 추정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익명의 중동 정보기관 관리가 '건물 안에 설치된 폭발물이 터져 새로운 원심분리기 시설의 지상 부문이 파괴됐다'라고 말했다"라고 보도했다.
이란의 이런 기민한 대응은 핵합의를 둘러싼 미국과 이란의 예민한 대치 상황과도 관련지을 수 있다.
2년 전 미국의 일방적인 탈퇴와 대이란 제재 복원, 유럽 측의 제재 동참에 대응해 이란도 지난해 5월부터 핵합의 이행 범위를 감축하면서 핵합의의 존속이 매우 위태로워졌다.
미국과 유럽, 이란이 붕괴 직전인 핵합의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려고 치열하게 외교전을 벌이는 터라 이란으로서는 서방 언론의 비밀 핵시설 의혹이 커지기 전에 이를 먼저 해소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미국이 핵합의에 따라 10월 종료하기로 했던 대이란 무기 금수 제재를 무기한 연장하려고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국면에서 이란도 상대에게 빌미를 줄 수 있는 '불리한 트집'을 잡히지 않으려고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는 셈이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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