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진위기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운명 열쇠쥔 러시아 속내는?

입력 2020-08-18 20:44  

퇴진위기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운명 열쇠쥔 러시아 속내는?
러시아, 벨라루스 대선 불복 시위 사태에 이례적으로 미온적 태도
"최근 양국 긴장 관계 반영…'방패막이' 루카셴코 축출까진 원치 않아"
서방, 러시아 군사개입 가능성 경고…향후 사태 전개따라 공세 취할 듯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옛 소련에서 독립한 동유럽 소국 벨라루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 사태가 심상찮다.
지난 9일 대선에서 26년을 장기집권해온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80% 이상의 압도적 득표율로 6선에 성공했다는 개표 결과가 알려진 뒤 시작된 시민들의 대선 불복 시위가 17일까지 아흐레째 이어지며 루카셴코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루카셴코 대통령이 비슷한 수준의 압승을 거둔 2010년, 2015년 대선 뒤에도 야권의 저항 시위는 있었지만, 규모는 훨씬 작았고 오래 지속하지도 않았다. 수도 민스크를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졌었고 참가자들도 주로 젊은 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주일 넘게 저항 시위가 계속되고 있고 지난 16일 시위에는 무려 20만명 이상이 참가했을 정도로 규모도 유례가 없는 수준이다.
민스크는 물론 전국 주요 도시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시위에 다양한 연령층과 여성들까지 참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규모 기업과 공장 근로자들까지 파업을 선언하고 길거리로 몰려나오고 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여전히 야권의 재선거 및 자진사퇴 요구에 대해 "내가 죽은 뒤에도 있을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티고 있지만 거세지는 야권과 서방의 압박을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수의 전문가는 위기의 벨라루스 정국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방향타는 벨라루스의 '큰 형' 러시아가 쥐고 있다는데 견해를 같이한다.
대규모 저항 시위에 위기를 느낀 루카셴코 대통령도 지난 15일과 16일 잇따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했다.
상세한 통화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루카셴코는 옛 소련권 국가들의 안보협력기구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틀내에서 벨라루스의 요청 시 러시아가 즉각 안보보장을 위한 지원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벨라루스 사태에 대한 지금까지의 러시아 반응은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졌던 야권의 친서방 시위 사태 때와 비교할 때 상당히 미온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같은 러시아의 태도는 근년 들어 지속해온 러시아-벨라루스 간 불화와 푸틴-루카셴코 대통령 간 긴장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옛 소련 '형제국'인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지난 1999년 연합국가(Union State) 창설 조약을 체결한 뒤 국가통합을 추진하고, 2014년에는 옛 소련권경제공동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EU)을 함께 출범시키는 등 정치·경제적으로 각별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러시아가 벨라루스에 대한 원유·가스 공급가 인상에 나서고, 벨라루스의 주권을 제한하는 식의 연합국가 창설을 추진하면서 불화가 생겼다.
벨라루스가 만성적 경제난을 겪는 와중에 러시아도 자체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벨라루스에 대한 특혜 조치들을 폐지하면서 양국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는 분석이다.
연합국가 추진 과정에서 러시아가 벨라루스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단일 통화를 도입하려 하자 벨라루스는 주권 침해라며 반발해 왔다.
양국의 불화는 이번 대선에 앞서 벨라루스 보안당국이 러시아가 민스크로 파견한 민간용병업체 요원 33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벨라루스 측은 러시아가 벨라루스의 대선 정국에 혼란을 조성하고 루카셴코 대통령의 압승을 저지하기 위해 비정규군 요원들을 파견해 공작을 펼치려 했다고 비난했다.
러시아로선 루카셴코 대통령의 압승을 저지해 정치적 입지를 약화함으로써 러시아에 보다 순종적으로 만들고 싶어했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선거 이후 벨라루스 정국이 격랑에 휩싸이고 자칫 루카셴코 대통령이 축출될 위기에까지 몰리면서 러시아의 계산법도 복잡해진 것으로 보인다.
푸틴과 루카셴코는 서로를 좋아하진 않지만 한 사람의 몰락은 다른 사람의 몰락을 의미한다는 점을 크렘린궁도 잘 알고 있다고 BBC 방송은 지적했다.
막심 사모루코프 모스크바 카네기센터 연구원도 "러시아가 루카셴코를 몰아내길 원한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면서 "러시아의 최우선 과제는 벨라루스가 서방으로 편입되는 것을 막는 것이고, 독선적인 루카셴코가 그런 과정을 막을 수 있는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선 2014년의 정권교체 혁명으로 이미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 우크라이나에 이어 또 다른 옛 소련 '형제국' 벨라루스가 서방 진영으로 편입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러시아가 군사개입까지 시도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리나스 린케비추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앞서 언론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벨라루스 사태에 군사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이와 함께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때와는 달리 러시아가 벨라루스 사태에 개입할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벨라루스 야권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을 뿐, 뚜렷하게 반(反)러시아적이거나 친서방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야권 지도자 중에도 러시아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현재로선 러시아가 벨라루스 사태의 전개 상황을 더 지켜본 뒤 구체적 행동을 취할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만일 루카셴코가 실제로 축출되고 나면 러시아가 벨라루스에 필수적인 석유·가스 공급을 중단하고, 비정규군을 투입해 친러시아적 정권이 들어서도록 공작을 펼치는 등의 공세적 조치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cjyou@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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