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30주년 기념식…동독 평화혁명가들 위한 새 기념비 제안
"현재가 최고의 독일…통일 이후 실수에 대해 비판적 시선 필요"
극심한 '서서 갈등' 관리 통한 평화적 분단관리로 통일 초석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독일 통일 30주년인 3일(현지시간)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통일의 성과를 강조하면서도 후유증 극복을 위한 사회통합의 진전을 당부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이날 브란덴부르크주 포츠담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냉전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를 감사의 마음으로 되돌아본다"면서 "오늘날의 독일은 역대 최고의 독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지난 30년간 "실수가 발생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 공개적인 논의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옛 동독지역의 발전된 모습을 언급하면서도 아직 남아있는 동서독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통일 후 서독지역보다 동독지역의 시민이 더 격변을 맞이했다면서 "사람들이 불이익을 영구적으로 받는다고 느끼면 응집력이 무너지고 정치에 대한 불신이 증가하고 포퓰리즘과 극단주의의 번식지가 늘어난다"고 지적했다.
이어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동독 체제를 종식한 평화 혁명가들을 위한 새 기념비 건립을 제안했다.
그는 "동독 시민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사실상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되면서 동독지역 시민에게 '패자'의 감정이 생기고 사회통합의 심리적 장벽으로 작용하는 현실의 문제점을 반영한 것이다.
동독지역 시민이 '패자'가 아니라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들고 일어난 통일의 주체였다는 점을 강조해 자긍심을 높이려는 발언이다.
실제 1989년 11월 당시 동독 정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의 시위가 거세지자 이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서독 여행 자유화 조치를 발표했다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 통일의 날 기념식에는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 등 주요 인사 200여 명이 참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로 예년보다 참석 인원이 5분의 1 수준으로 제한됐다.
참석자들은 사회적 거리를 유지했고, 참석 인원 외의 행사 규모도 간소화됐다.
이와 관련해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우리가 큰 공식 행사를 열 수 없을지라도 오늘은 의미가 크다"라며 "독일 통일의 날은 기쁨과 용기로 되돌아보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독일 정부는 지난해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에 이어 올해 독일 통일 30주년을 맞아 성대한 행사를 마련하려 했으나, 코로나19 확산 사태로 야외 전시 및 온라인 행사로 축소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분단된 후 민주주의 체제의 서독과 공산주의 체제의 동독이 대치했다.
서독은 1970년대에 극심한 내부 갈등의 극복 및 관리를 통해 동서독 교류·협력 정책인 신(新)동방정책을 추진해나가며 분단을 평화적으로 관리했다.
독일 통일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급속히 진행됐다.
같은 달 28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통일 계획 10개항을 발표했는데, 그때만 해도 5∼10년의 이행 기간을 전제로 했다.
동독에서도 공산체제의 온건파 지도부가 들어서며 점진적 통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동독 시민의 민주화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결국 1990년 3월 18일 동독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민주적인 총선이 실시됐다.
총선에서는 콜 총리가 지원하는 신생 통합기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같은 해 7월 서독 마르크화로 화폐통합이 이뤄지며 사실상 동독 경제가 서독의 관리 체제에 들어갔다.
서독 정부는 이 과정에서 2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으로부터 사실상 통일에 대한 외교적 승인을 얻어냈다.
동서독은 결국 같은 해 8월 31일 통일조약을 체결했고, 한 달 여 뒤인 10월 3일 조약이 발효돼 통일의 대업을 이뤘다.
lkbi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