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퇴치·백신 개발에 20년간 550억달러 투자…코로나 사태서도 '막후 지휘'
'코로나 퍼뜨렸다' 음해에도…저소득국가 백신 보급 '사명'처럼 앞장
(서울=연합뉴스) 이윤영 기자 = 빌 게이츠(Bill Gates).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이자 세계 2위 부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선사업가.
전 세계가 유례없는 팬데믹에 고통받고 있는 지금, 그의 이름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바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위한 전 세계의 노력을 지휘하고 지원하는 '막후' 사령탑으로서다.
최근 화이자와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등 다국적 제약사가 코로나19 백신 개발 성과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코로나19 종식에 대한 전 지구적 염원이 커진 가운데 뉴욕타임스(NYT)가 23일(현지시간) 그의 이런 역할을 조명하는 장문의 기사를 실어 눈길을 끈다.
게이츠가 부인 멀린다와 함께 운영하는 자선재단 '빌 앤 멀린다 재단'을 통해 결핵, 에이즈 등 전 세계, 특히 빈곤국에서의 전염병 퇴치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각종 바이러스, 전염병 예방을 위한 백신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백신 개발 투자에 열을 올려왔고,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훨씬 이전부터 '팬데믹'의 위험성을 꾸준히 경고했다.
이 때문에 실제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 그는 음모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가 백신 실험을 위해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수천명의 아이를 죽였다거나 코로나19 역시 그가 퍼뜨린 것이라는 주장 등이다. 일부 공화당원은 백신 접종이 게이츠가 사람들에게 마이크로칩을 이식해 추적하기 위한 음모의 일환이라 믿는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다.
하지만 게이츠는 이런 근거 없는 주장들 속에서도 의연히 백신 개발을 이끌어왔다고 NYT는 평가했다.
NYT는 "전세계 백신 개발의 막후에서 일하는 인물은 과학자도, 의사도 아닌, 세계에서 두번째로 부자인 사람"이라며 "그 자신과, 그가 이끄는 재단이 (코로나19) 사태에 핵심 역할을 하는데 특별히 잘 준비돼있다고 보는 사람"이라고 해설했다.
게이츠는 인터뷰에서 "우린 정부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제약사들과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며 "우린 이 시나리오(코로나19 관련)에 대해서도 생각해왔다. 우린, 최소한 전문지식과 관계적인 측면에서 매우,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가 코로나19 사태의 심각성을 예측한 것은 올 초 중국 우한에서 신종 바이러스가 빠르게 퍼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2월14일, 그는 재단 관계자들과 모여 대응 전략을 논의했다. 게이츠는 "'코드 레드'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로부터 2주 뒤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대표인 세스 버클리 박사가 게이츠를 만나기 위해 시애틀로 날아왔다. 두 사람은 조찬을 함께 하면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백신 공급 문제를 논의했다.
이어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유행을 '팬데믹'으로 명명한지 이틀 뒤인 3월13일, 게이츠는 화이자, 존슨앤드존슨 등 12개 제약사 대표와 백신 개발을 위한 온라인 회의를 열었다.
NYT는 "자신이 지금껏 550억달러(약 61조1천500억원)를 투자하면서 전세계 기관들과 협력해온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해 준비해온 것이구나, 하고 그는 느꼈다"고 전했다.
그는 백신 개발에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재단을 통해 백신 프로그램에 160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이중 4분의 1은 Gavi에 지원됐다. 또 1억달러 기금을 투자해 국제민간기구인 감염병혁신연합(CEPI)의 창설을 도왔다. Gavi와 CEPI는 현재 WHO 주도의 코로나19 백신 개발 및 보급 계획을 담당하는 두 축이기도 하다.
직원 1천600명을 둔 그의 재단은 제약사뿐 관련 벤처기업, 학계에도 지원을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최근 화이자와 함께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성공한 독일의 바이오엔테크다. 이 회사는 지난해 9월 게이츠 재단으로부터 5천500만달러를 투자받았다. 한국의 SK바이오사이언스에도 360만달러를 지원했다.
23일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발표한 영국 옥스퍼드대도 빌게이츠 재단의 투자처다.
그는 세계 각국 지도자, 제약사 대표들과도 수시로 연락하면서 백신 개발 상황을 조율하는 '로비스트' 역할도 하고 있다.
제약사 관계자들과의 화상 회의를 수차례 주최하고, 각국 정부의 자금 지원을 위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아랍에미리트(UAE)의 셰이크 무함마드 빈 자예드 알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자 등 한주에 4명의 정상과 통화한 적도 있다.
미국에서는 감염병 최고 권위자인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과 수시로 통화하며,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 등 정계 대표들과도 상의하고 있다.
매코널 원내대표는 "그는 명성이 있고 평판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와도 즉각 연락이 닿을 수 있다"며 이러한 팬데믹 상황에서는 특히 그가 정부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백신이 선진국의 점유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데도 그는 힘을 쏟고 있다.
코로나 백신 개발 소식이 최근 앞다퉈 전해지고 각국의 백신 확보 경쟁도 달아오르면서 긴급한 화두로 떠오른 것도 바로 '백신이 얼마나 공정하게 보급되느냐'다.
NYT는 선진국의 백신 선점으로 빈곤국은 내년 말까지 인구의 약 20% 정도만 접종할 수 있는 백신 확보에 그칠 것이라면서 이들은 '어떤 제약사의 백신을 선택할지'는 고사하고, 과연 '제약사들이 백신을 공급해줄지'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결국 '돈'에 직결된 문제인 셈이다. 게이츠도 "자본주의적인 것이 지배하는 일부 영역이 확실히 있다. 북한은 그리 많은 백신을 갖지 못하고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백신 개발과 공급의 자본주의적 측면을 토로한 발언이다.
하지만 파우치 소장은 인터뷰에서 게이츠는 애초부터 백신이 개발도상국에서 사용될 수 있으리라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어 했다면서 "그게 원래 빌 게이츠다"라고 말했다고 NYT는 전했다.
일부에서는 민간 기업인으로서 제약사와 공중보건계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이 너무 막강해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혹시나 지원금이 끊길까, 공개적으로 이를 비난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런 업계의 '자기 검열'을 빗대 '빌 칠'(the Bill Chill)이라는 신조어도 널리 퍼졌다.
또 게이츠가 영국, 유럽연합 등 여러 국가에서 막대한 지원금을 끌어냈지만 정작 모국에서는 WHO에서 탈퇴한 트럼프 대통령의 비협조로 도움을 받지 못한 것도 그에겐 숙제처럼 남았다고 NYT는 지적했다.
y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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