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세계 최초' 백신 접종 현장 가보니…차분함 속 착착 진행

입력 2020-12-08 23:49   수정 2020-12-09 12:04

[르포] '세계 최초' 백신 접종 현장 가보니…차분함 속 착착 진행
런던 남부 크로이던 대학병원…아침부터 노령층 발길 이어져
접종자에게는 '면역카드' 발급…한달 뒤 2차 접종 예정
"두려워 말고 맞아야" vs "너무 빨리 개발된 백신 못 믿어"




(런던=연합뉴스) 박대한 특파원 =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약 15km 남쪽에 있는 크로이던은 센트럴 런던을 제외하면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곳 중 하나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지내는 크로이던은 8일(현지시간) 새벽부터 낀 자욱한 안개로 평소에도 심한 교통 체증이 더 심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크로이던 대학 병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나이가 지긋한 이들이 홀로, 또는 부부간에 손을 잡고 속속 도착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크로이던 대학병원은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가 지정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 허브 중 한 곳이다.
잉글랜드에서만 크로이던 대학병원을 포함해 모두 50곳이 선정됐다.
영국 정부는 이날 전 세계 최초로 화이자-바이오엔테크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효과나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러시아나 중국산 백신을 제외하면 사실상 사용이 승인된 첫 코로나19 백신이다.
올 한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하던 인류가 처음으로 반격에 나선 순간이기도 하다.


◇ 파란색 줄로 접종장소 안내…오전부터 발길 이어져
크로이던 대학병원은 며칠 전부터 벨기에에서 넘어온 화이자의 백신을 냉동 보관하면서 접종 준비를 진행해왔다.
오전 10시께 대학병원에 도착해 접수 담당자에게 접종 센터를 묻자 바닥에 파란색 페인트로 그려진 줄을 따라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약 200m를 걸어가니 몇몇 노인들이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로비에는 약 10명의 노인이 소파와 책상 등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NHS 소속 직원들이 옆에서 이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현장직원에게 신분을 밝히고 접종 장면을 촬영하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다고 말하자 책임자를 불러오겠다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나온 직원은 그러나 이날 접종 프로그램은 NHS 전반적으로 시행하는 프로그램으로, NHS 본부의 허가 없이는 촬영 및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크로이던 대학병원에 얼마나 많은 백신이 보관돼 있고, 하루에 몇 명이나 접종이 가능한지 물었지만 역시 NHS에 공식질의해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건물 밖으로 나가서 잠시 대기하자 한 노부부가 안에서 걸어나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백신을 접종했냐"고 묻자 부부는 "그렇다"고 말했다.
마이클씨는 91세, 아내인 에리카씨는 87세. 영국 정부가 정한 지침에 따르면 이들은 요양원 거주자와 함께 최우선적으로 백신을 맞을 수 있는 80세 이상에 해당했다.
백신을 맞으러 뉴 에딩턴에서 아침부터 1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왔다는 마이클 씨 부부는 백신을 맞은 소감을 묻자 "매우 좋다"면서 접종 이후에도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에리카씨는 이틀 전인 일요일에 NHS로부터 백신 접종을 받으러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백신 안전성에 대해 우려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마이클씨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면서 "91세인 내가 백신을 맞아도 이렇게 문제가 없지 않느냐. 모두 자기 차례가 되면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부는 자신들이 가장 먼저 백신을 맞았지만 아직 주변의 친구나 가족은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며, "그들이 모두 백신을 접종해 예전처럼 아무 걱정없이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동안에는 반드시 마스크를 쓰고, 자주 손을 씻는 등 코로나19 지침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만난 데이비드(80) 씨와 아내 카린(67) 씨 역시 백신 접종 후 한결 기분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남편 데이비드씨는 80세 이상이라 백신을 맞았지만 카린씨는 60대라 아직 접종 대상이 아니다.
데이비드씨는 병원에서 일하는 지인을 통해 접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역시 지난 6일 통보를 받았다.
그는 이날 접수부터 접종을 마치고 나오기까지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며, 직원들이 친절히 모든 과정을 안내했다고 전했다.
데이비드씨는 "영국이 세계 최초로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면서 "과학자들이 열 달 만에 백신을 개발했다는 것도 놀랍다"고 말했다.
데이비드씨는 지갑에서 자신이 맞은 백신 종류와 접종 일자 등의 정보가 적힌 '면역 카드'(immunisation card)를 보여주면서, NHS에서 한 달 뒤 2차 접종 시간을 알려줄 예정이라고 전했다.
일부에서 백신 접종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대해 카린씨는 접종을 의무화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일부선 안전성 우려 여전…"나는 안 맞을 것"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이뤄지는 병동에서 나와 일반병동 쪽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러나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랐다.
60대 여성 샐리씨는 자신이 지난해 심장에 이상이 생겼고, 당뇨 질환도 가진 기저질환자라고 소개했다.
이에 따라 조만간 백신 접종 순서가 돌아올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접종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는 무조건 백신을 맞을 것인지를 묻자 "담당 지역보건의(GP)가 권하는 대로 따를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대중교통이나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서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너무 많다"며 "백신보다는 누구나 코로나19 관련 규정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환자복을 입고 병동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 2명의 생각은 백신 접종에 부정적이었다.
다리를 다쳐 입원한 패리스(22)와 그녀를 병문안 온 사촌 동생 키라(17)는 절대 백신을 맞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패리스는 "백신이 너무 빨리 개발됐다. 믿을 수 없다"면서 "내 몸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지 않으냐. 누구도 100%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만큼 맞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에서 백신 접종이 처음 시작된 데 대해서 키라는 "보리스 존슨(총리)은 중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한 뒤에도 너무 늦게 봉쇄조치(lockdown)를 도입해 피해를 키웠다"면서 "그런데 이번에는 가장 먼저 백신을 도입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이날 전 세계 최초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남런던 크로이던 대학병원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큰 혼란 없이 접종을 진행했다.
특정 시간대에 15명 내외의 접종자만 대기할 정도로 인원이 분산된데다, 많은 NHS 인력이 몸이 불편하거나 의사소통이 어려운 고령층을 옆에서 세심히 돌보는 모습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나올 때도 백신 접종을 받으러 온 듯한 노인들의 발길이 병동으로 이어졌다.
지루했던 코로나19와의 싸움처럼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병원 주변은 안개로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백신이 던진 희망을 반영하듯, 정오가 가까운 시각 병원을 둘러싼 유리창문에는 런던의 겨울 날씨답지 않은 맑은 햇살이 쏟아졌다.
2020년 한해 코로나19로 신음했던 인류는 마침내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카운터 펀치를 날릴 준비를 마쳤다.
pdhis9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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