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부터 주차요금까지 광범위…권한남용·이해충돌 지적
가디언, 관습적 권한 '여왕의 거부권' 비판
(서울=연합뉴스) 강훈상 기자 =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찰스 왕세자가 1천건이 넘는 법안을 의회보다 먼저 받아보고 '검열'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법안이 의회에 회부되기 전 내용을 볼 수 있는 영국 군주의 관습적이고 불문(不文)의 권한인 '여왕의 동의권'(Queen's consent)을 이용한 것이긴 하지만 왕실의 사익과 관련된 법안도 포함됐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여왕의 동의권 행사가 '이해충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1952년 여왕이 즉위부터 지금까지 사전에 들여다본 법안은 1천62건으로 분야가 광범위했다.
가디언은 브렉시트, 법무, 사회보장, 연금, 식품 정책 등 주요 법률뿐 아니라 주차 요금, 수상 호버 크래프트 규정과 같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법률도 여왕의 '검열 대상'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여왕이 의회보다 먼저 심사한 법률 초안 가운데는 사유 부동산, 조세, 주택과 같은 개인 자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포함됐다"라며 "여왕의 동의권이라는 모호한 절차가 추정보다 너무 폭넓게 행사됐다는 방증이다"라고 비판했다.
일례로 여왕과 찰스 왕세자는 상속과 자산 수탁자의 권한과 관련한 법률이 의회에서 가결되기 2년 전인 2014년 이 법률 초안을 먼저 검토했다.
2013년엔 여왕이 런던과 버밍엄 간 고속철도를 부설하는 법안에 동의권을 행사했다. 영국 교통부 장관은 이 철도를 완성하려면 왕실 소유의 부동산 21건을 수용해야 해 '왕실의 이익'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여왕의 동의를 요청했다.
가디언은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인 영국 윈저 왕실은 수 세기 동안 고가 미술품과 보석을 수집했지만 상속세가 면제된다"라며 "왕실은 그들의 재정을 보호하는 데 악명이 높다"라고 혹평했다.
영국 왕실의 정확한 자산 규모가 알려진 적은 없다.
이 신문은 여왕이 동의권을 행사한 1천62건의 법률 가운데 어떤 내용을 바꾸려 했는지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최소 4건의 법률 초안에 대해 수정하려는 여왕 측의 로비가 있었다면서 더 많은 법률에 개입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여왕이 동의권을 행사한 법률의 수에 대한 가디언의 질의에 왕실 측은 답변하지 않았다.
다만 "여왕의 동의권은 오랫동안 확립된 관습"이라며 "왕실의 특권과 이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법률을 논쟁하도록 동의해달라고 의회가 요청하면 여왕이 행사하는 것이지 왕실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영국 리버풀 대학 헌법학자 애덤 터커 박사는 가디언에 "왕실과 관계되지 않은 이 많은 법률에 대해 여왕이 동의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라며 동의권이 남용됐다고 비판했다.
가디언은 전날에도 여왕이 1973년 자신의 재산이 대중에 공개되는 것을 꺼려 기업 투명성 법안 초안을 미리 받아보고 이를 수정하려고 변호사를 통해 내각을 상대로 '압박성 로비'를 벌였고 결국 원하는 대로 조항을 바꿨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여왕의 동의권에 대해 '입법과정의 비밀스러운 절차'라며 강하게 비판하는 입장이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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