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기 총리 "어떤 법이든 자유롭게 논의 가능"…교황청 대응 주목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가 '성 소수자 혐오 반대 법안'에 대한 교황청의 외교적 항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일간 라 레푸블리카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드라기 총리는 23일(현지시간) 밤 상원 대정부 질의에서 "우리나라는 세속 국가이지 종교 국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의회는 어떤 법이든 자유롭게 논의하고 통과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법 체제는 법률이 언제나 헌법적 원칙과 국제적 책무를 존중하도록 보장하며, 여기에는 교회와 맺은 조약도 포함된다"고 부연했다.
'교회와 맺은 조약'은 무솔리니 통치 때인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에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Lateran Pacts)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국으로서의 바티칸시국 지위, 교황의 수위권(Papal supremacy), 가톨릭 신자의 신앙 및 표현의 자유 등을 인정한 조약이다.
드라기 총리는 또 "세속적 원칙은 국가가 종교에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자유를 보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1989년 종교 이슈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문 내용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는 이탈리아 정치권에서 입법을 논의 중인 성 소수자 혐오 반대 법안을 두고 교황청이 외교 채널을 통해 항의의 뜻을 표시한 것과 관련한 드라기 총리의 첫 공개 대응이다.
이탈리아의 성소수자 혐오 반대 법안은 게이나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의 성소수자 및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폭력을 선동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작년 11월 하원 표결을 통과한 뒤 현재 상원에 계류돼 있다. 진보-보수 정당 간 입장차가 뚜렷해 입법에 진통을 겪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교황청이 외무장관인 폴 리차드 갤러거 대주교를 통해 지난 17일 외교 공한의 하나인 구술서(Note Verbale)를 주교황청 이탈리아 대사관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돼 주목을 받았다.
교황청은 구술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으나, 이탈리아 현지 언론은 해당 법안이 신앙 및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교황청의 우려를 담았다고 보도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동성결혼 반대 등과 같이 성 소수자 권리에 반하는 의견을 내놓을 경우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 있고, 이는 결과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교황청은 구술서에서 해당 법안이 라테라노 조약에 위배될 수 있다는 점도 적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청이 라테라노 조약까지 언급하면서 이탈리아 국내 입법 과정에 목소리를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드라기 총리의 발언에 대해 교황청에서는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아직 이렇다 할 논평이 나오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교황청의 향후 맞대응 수위에 따라 초유의 종교 갈등 양상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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