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기억력 나이 늘어도 쇠퇴 안 해…"뇌에 해마 없는 탓"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갑오징어는 꽤 똑똑한 해양생물로 알려져 있는데, 지난 며칠간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특히 나이가 들어도 이런 기억력은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따르면 이 대학과 미국 해양생물실험실(MBL) 등의 연구진은 갑오징어(Sepia officinalis)를 대상으로 한 기억력 시험 결과를 영국 '왕립학회보 B'(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에 발표했다.
시험 대상 갑오징어의 절반은 부화한 지 10~12개월로 아직 성체가 되기 전이며, 나머지 절반은 22~24개월로 인간 수명으로 따지면 90대에 해당한다.
연구진은 MBL에서 진행된 실험을 통해 갑오징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를 기억하고 먹이를 결정할 때 활용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특히 나이 든 갑오징어는 근육 기능이 떨어지고 식욕이 줄어드는 등의 노화 현상을 보였으나 기억력은 쇠퇴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이는 구체적 사건에 대한 동물의 기억력이 노화와 함께 쇠퇴하지 않는다는 첫 증거라고 연구진은 밝혔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예컨대 지난주 수요일 저녁에 먹은 메뉴와 같은 특정 시점과 장소에서 경험한 구체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능력이 점점 떨어진다. 이런 기억을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이라고 하는데 뇌의 해마 부위 쇠퇴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오징어 뇌는 해마가 없고 인간의 뇌와는 구조 자체가 다르다. 뇌의 수직엽(葉) 부위가 기억 및 학습을 담당하는데, 죽기 2~3일 전까지는 쇠퇴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런 점이 갑오징어가 나이 들어도 일화기억 능력이 영향을 받지 않는 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제시했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를 위해 우선 갑오징어가 수조 내에서 검은색과 흰색 깃발로 표시된 곳을 찾아가면 특정 깃발이 표시된 곳에서 흔한 먹이 중 선호하는 홍다리얼룩새우나 왕새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4주간 매일 학습하게 했다.
그런 다음 갑오징어가 언제, 어디서, 어떤 먹이를 먹었는지를 기억하는지 시험했다. 갑오징어가 패턴을 학습해 먹이를 얻는 것을 피하려고 매일 먹이를 주는 곳을 바꾸기도 했다.
그 결과, 나이와 관계없이 모든 갑오징어가 각 깃발에서 어떤 먹이가 나오는지를 본 뒤 이 기억을 활용해 최선의 장소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논문 제1 저자인 케임브리지대학 심리학과의 알렉산드라 쉬넬 박사는 "기억력 시험에서 나이 든 갑오징어가 젊은 개체만큼 우수했으며, 사실상 더 뛰어났다"면서 "이런 능력이 야생에서 한번 짝짓기 한 상대를 기억하고 다시 고르지 않아 개체군 내에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논문 공동 저자인 MBL 선임과학자 로저 핸런 박사는 "야생과 실험실에서 갑오징어를 수십 년간 연구해왔지만 이런 지적 행동은 우리마저 놀라게 했다"면서 "뇌와 행동 간 관계와 관련해 앞으로도 많은 발견이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
갑오징어는 수명이 약 2년 정도로 노화에 따른 기억력 저하를 연구하는 대상이 돼 왔다.
연구진은 동물의 기억력을 직접 측정하기 어려워 일화기억과 같은 방식을 활용해 연구를 진행했다.
쉬넬 박사는 앞서 갑오징어가 아동의 자제력을 시험하기 위해 개발된 '마시멜로 테스트'에서 침팬지나 까마귀 수준의 자제력을 갖고 있으며, 눈앞의 먹이를 보고 더 큰 보상을 위해 오래 참는 갑오징어가 더 높은 학습력을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eomn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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