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복지 모회사+개발 자회사 정부 방안은 어려울 듯
"장기 과제로 검토해야" 목소리도
(서울=연합뉴스) 윤종석 기자 = 한국토지주택공사(LH) 신도시 땅 투기 의혹 사건으로 검토가 시작된 LH 조직개편 방안이 수개월에 걸친 당정 협의에도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올 3월 초유의 LH 사태가 터진 직후엔 해체 수준의 대규모 조직개편 방안이 언급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다 주거복지라는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LH가 주거복지 정책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는 만큼 섣부른 조직개편으로 주거복지가 약화하는 위험을 감수할 것이 아니라 장기과제로 조직개편을 검토하자는 신중론이 대두한다.
23일 국회와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정부는 LH를 주거복지 기능을 모(母)회사로, 토지·주택 개발 분야를 자(子)회사로 하는 모자 구조의 수직분리 개편 방안을 추진했으나 이 방안은 사실상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국토부는 지난주 국회 공청회에서 모자 구조 개편방안을 최적안으로 제시했으나 전문가 패널이나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의원들 대부분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모자 구조 개편안은 LH가 주거복지와 개발사업 분야를 분리하면서도 임대주택 사업 등 주거복지 사업을 계속 안정적으로 영위하도록 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성격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거론된 안 중에는 기능별 수평 분리 방안도 있지만, 지금과 같이 개발 사업이 주거복지 사업의 재원을 충당하는 '교차보전'을 유지하려면 수평 분리로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 조직을 분리하려면 그나마 주거복지 조직이 개발 조직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는 수직 분리 방안밖에 없다는 것이다.
매년 LH의 주거복지 사업에서 1조5천억원 이상의 적자가 나고 있고 LH는 택지 판매와 주택 분양 등을 통해 3조원을 벌어 주거복지 부문의 적자를 메우고 나머지는 재투자하거나 정부배당 등을 해 오고 있다.
하지만 모자 구조 역시 모회사가 주거복지 사업을 하려면 자회사로부터 자금을 받아와야 하는데, 덩치도 훨씬 작고 인사권도 행사할 수 없는 모회사가 자회사를 제대로 제어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강하게 제기됐다.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은 이를 빗대 "할아버지가 돈도 못 버는데 설날에 세배하러 가자고 하면 아이들이 잘 가겠느냐"고 했다.
LH가 모자 구조로 개편되면 주거복지 기능이 오히려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개발 자회사가 경영 여건 등을 이유로 모회사로 올리는 자금을 줄이면 그만큼 정부 재정이 투입되거나 주거복지 규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어느 조직이든 이익이 많이 생겨도 외부로 보내기보다는 내부에서 흡수하려 할 것이라는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주거복지에 대한 국민의 요구 수준은 올라가고 있고, 투입돼야 할 예산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주거복지로드맵, 중산층도 살 수 있는 통합임대 등 정부의 주거복지 신사업 과제는 산적해 있다.
가뜩이나 LH가 부쩍 늘어난 주거복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자본금을 40조원에서 증액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로선 50조원 정도가 거론되고 있지만 LH 땅 투기 사건 이전에는 60조원까지 거론됐다.
하지만 지금 LH 조직 개편부터 걸려 있어 당장 급한 자본금 증액 문제를 처리하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다.
현재 3기 신도시 등 대규모 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기에 2030년 중반까지는 LH의 먹거리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개발사업은 현저히 줄어드는 반면 주거복지 비용은 갈수록 늘 수밖에 없기에 적자 전환도 우려된다.
정부는 지금까지 어떻게든 LH 조직을 쪼개는 데에만 집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직을 쪼개면 주거복지 교차보전의 틀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여러 각도에서 확인됐다.
정부가 지금까지 LH 조직 분리 방안을 고심한 것은 그만큼 LH 사태가 국민에게 큰 충격과 실망감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 조직 슬림화를 하는 것만으로 국민 눈높이를 충족하겠느냐는 고민이 있었다.
게다가 정부는 이미 국민의 공분이 끓어오를 때 '해체' 수준의 조직개편을 공언한 바 있다. 정치권에서도 LH를 조직 해체 수준으로 환골탈태를 시켜야 한다는 강경론이 컸다.
하지만 어느덧 이같은 목소리는 줄어들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LH 땅 투기 사건에 대한 기억도 차츰 흐려지고 있다.
게다가 정부와 국회의 대대적인 땅 투기 조사에서 LH 직원만 아니라 지자체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중에서도 땅 투기 연루 의심을 받는 이가 적잖이 나오고 있다. 사달의 시작은 LH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국회에서 이 문제가 더 이슈다.
국회 국토위 위원들은 공청회에서 LH 조직개편 방안을 좀 더 신중히 검토하자고 입을 모았다.
섣불리 조직 개편을 했다가 주거복지 기능이 마비되는 우를 범할 수 없다는 신중론이 대두했다. 일부 의원은 LH 조직의 틀을 유지하면서 견제와 균형을 이룰 방안을 찾자고도 했다.
이 때문에 LH 조직개편 검토는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정부는 LH 조직의 분리 외에 원형을 유지하면서 조직간 상호 견제하고 감시하면서 부패와 방만경영의 고리를 끊는 방안도 검토 대상으로 올려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부로선 이 방안에 과연 국민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냐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당장 정부는 8월 중으로 LH 조직개편 방안을 내놓겠다는 일정표를 제시한 바 있지만 일정은 한참 뒤로 밀릴 공산이 크다.
과거 주택공사와 토지공사를 통합하는 데에만 15년이 걸렸는데 그에 준하는 조직개편을 수개월만에 할 수 있느냐는 의견도 있다.
어차피 LH 조직개편은 한국토지주택공사법 개정 사안이기에 국회가 정부 안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인 이상 8월 중 조직개편 방안 발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LH 조직의 분야별 자산 파악 등 면밀한 분석부터 다시 벌여 중장기 방안으로 신중히 조직 개편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토론회에서 "LH의 자산 파악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조직 개편을 추진하는 것"이라며 "100억원짜리 회사도 이렇게는 안 할 것인데, LH는 총사업비가 300조원이 넘는 회사"라고 지적했다.
차제에 주거복지 사업을 LH의 재원으로 하지 않고 정부 재정으로 하는 방안을 고민해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면 상당한 정부 지출이 불가피한 만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수적이다.
국토부도 대안 마련에 나섰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고심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현재 이 사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면으로 고민하고 있다"며 "현재 여러 의견이 모여 다각도로 검토 중인데, 아직 정부의 입장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banan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