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미 vs 반미 대립구도 변화…각국 외교정책 조정 급물살
(테헤란=연합뉴스) 이승민 특파원 = 오랜 기간 친미 대 반미 대립 구도를 보였던 중동 정세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은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 아래 중동에서 '철수'를 진행 중이다.
미군은 지난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 했고, 올해 안에 이라크에서도 전투 임무를 종료하기로 했다. 지난달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설치한 첨단 미사일 요격 체계를 철수했다.
걸프국들은 미군의 아프간 철수로 이어진 혼란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봤다. 이들은 지역 외교·안보 지형에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복잡한 '외교 게임'을 벌이는 모양새다.
◇ 가까워지는 이스라엘과 아랍…"'아브라함 협약' 확장"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몇 차례의 중동 전쟁을 거치면서 이스라엘과 중동 이슬람권은 외교·종교적으로 대립해왔다.
그러던 지난해 9월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이 체결한 '아브라함 협약'이 역사적 변화를 가져왔다.
최근에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교류가 더욱 강화되는 추세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안한 아브라함 협정이 이제 걸프국들의 안보 의존 다변화의 통로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UAE의 지난 1년간 교역 규모는 이미 7억 달러(8천200억원)를 돌파했다.
양국은 우주 탐사 분야 협력을 위한 협약에도 서명한 상태다.
미국 해군 5함대가 주둔하는 바레인도 이스라엘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야이르 라피드 외무장관은 아브라함 협약 체결 1년 만에 지난달 30일 바레인을 방문해 하마드 빈 이사 알-칼리파 국왕과 회담하고 아브라함 협약의 확장 등 문제를 논의했다.
한 걸프국 고위 관리는 로이터 등과 인터뷰에서 "미국의 석유 의존도 완화를 반영하기 위한 외교 정책을 다수 걸프국이 진행해 왔다"며 "이런 외교 정책의 조정이 아프간 사태로 급물살을 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안보를 보장받아온 석유 부국들의 외교 정책 변화는 역내 동맹 관계와 라이벌 구도에도 변화를 줄 전망이다.
걸프국 관리는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된) 이 지역이 압력밥솥 같은 처지에서 좀 벗어나 보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전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은 (중동) 역외 균형자로 남기 위해 아브라함 협정, 이란 핵합의(JCPOA), 이란-사우디 관계 회복을 중첩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중동 전역에서 외교 게임이 시작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중동에서 진영론을 펴는 것이 아니라, 역내 영향력 있는 국가들 사이에 소위 '적대적 균형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 바이든 행정부의 목표일 것"이라면서 "그래야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고, 관리가 가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 이란-사우디, 단교 5년 만에 화해 모색…"세력 균형 이루려 할 것"
아브라함 협약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리지 않은 사우디는 이란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안정을 꾀하고 있다.
이슬람 시아파 맹주인 이란과 수니파 맏형인 사우디는 중동 지역의 패권과 주도권을 다투는 경쟁 관계다.
2016년 사우디가 이란의 반대에도 시아파 유력 성직자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사건을 계기로 양국의 외교 관계는 단절됐다.
그러던 두 나라는 올해 총 4차례 회담을 하고 관계 회복을 모색 중이다.
회담에서 이란은 사우디의 항구 도시 제다에 이란 영사관을 개설하고, 이슬람협력기구(OIC)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이란 국영방송과 관영 언론들은 사우디와의 회담, 무역 재개 소식을 전하면서 '화해 무드'를 조성하고 있다.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지난 20일 각료 회의에서 "이슬람 세계의 단합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전략이며, 불화의 불씨를 뿌리는 것은 적이 하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대립은 불가피하지만, 같은 이슬람권과는 협력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지난 8월 취임한 라이시 대통령은 중동 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새 정부 외교 정책의 핵심 기조로 강조해 왔다.
전문가들은 인접국인 아프간과 이라크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란이 사우디와의 대립을 계속 이어가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으로 입을 모았다.
극심한 경제난을 겪는 이란에 사우디와의 관계 회복은 핵합의 복원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우디는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사우디 고위 관리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이란은 정상 국가로 인정받고 핵 협상을 하기 원한다"면서 "사우디와 대화하고 지역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신호를 서방에 보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최근 중동 정세와 관련해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는 "전체적인 그림으로 미국이 빠졌을 때 세력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걸프 국가들이) 전반적으로 미국 없이 생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이란과 사우디가 아주 좋은 관계는 아니더라도 '긴장된 평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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