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라비다] 빈민촌 살던 이민자 소년, 아르헨 가전기업 일구기까지

입력 2021-11-08 07:22  

[비바라비다] 빈민촌 살던 이민자 소년, 아르헨 가전기업 일구기까지
최도선 피보디 대표, 입지전적 스토리로 현지서 주목받아
"난 성공보다 실패 많이 한 사람…한국인 DNA로 여기까지"


[※ 편집자 주 : '비바라비다'(Viva la Vida)는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의 스페인어로, 중남미에 거주하는 한인, 한국과 인연이 있는 이들을 포함해 지구 반대편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특파원 연재 코너입니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아르헨티나 가전기업 '피보디'(Peabody)의 최도선(56·단테 최) 대표에게 1983년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그해 아르헨티나 군부가 물러나고 라울 알폰신 전 대통령이 취임하자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촌에서 미등록 이민자로 살던 18세의 최 대표는 손편지를 들고 대통령궁으로 갔다.
군사정권 시절 기회조차 얻지 못한 합법 체류자격 취득을 호소할 생각이었는데, 온갖 억울한 사연을 들고 몰려든 인파를 보고 '사정 딱한 자국민도 이렇게 많은데 한국인 불법체류자의 편지를 과연 읽어주기나 할까' 걱정이 앞섰다.
반신반의하며 편지를 건네고 돌아온 지 사흘 만에 대통령의 답장을 받았고, 얼마 뒤 꿈에 그리던 영주권을 얻게 됐다. 이민 온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최 대표는 지난 4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민정 출범 후 우리 가족이 영주권 부여 첫 사례여서 이민청장까지 만났는데 당시 2층 청장 사무실에서 내려오면서 어머니가 정말 많이 우셨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최 대표가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건너온 것은 12살 때인 1977년이었다. 군부 쿠데타 이듬해였던 당시 아르헨티나에선 이민 행정도 거의 마비됐고 한국서 신청한 비자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새 출발이 간절했던 최 대표의 부친은 '파라과이를 거쳐 들어가면 방법이 생긴다더라'는 말을 듣고 무작정 빈손으로 떠났다.

관광비자로 일단 입국했지만 딱히 방법은 없었고, 가족은 6년 넘게 불체자 신분이었다.
"불법체류자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삶을 송두리째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학교도 다닐 수도 없어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었죠. 당시 경험은 지금까지도 제게 심리적 압박을 줍니다."
영주권을 손에 넣은 후 그는 뒤늦게 학교에 들어갔고 현지에 진출한 당시 대우실업에서 일도 시작했다.
늦은 나이 시작한 대학 공부는 다 마치지 못했지만, 3개월 번역 아르바이트로 들어갔던 대우에선 15년을 보냈다.
"일을 배우는 게 너무 재밌었죠. 종합상사라 의류, 중장비, 자동차, 가전, 방산, 곡물 등 온갖 사업을 했습니다. 인생의 귀중한 경험이자 밑거름이 됐고, 80∼90년대 성장하는 한국 경제에 동참할 수 있었죠."
한국의 국제통화기금(IMF) 위기와 대우 부도 등을 겪으며 1998년 회사에서 나온 그는 이후 직접 사업을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2001년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 등 안팎의 위기 속에 실패의 경험이 쌓여갔다.
지금의 피보디는 2004년 부도 위기 현지 기업을 인수해 브랜드를 유지한 것이다.
크고작은 위기는 계속됐다. 2011년에도 투자 실패로 모든 걸 잃고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했다.
넘어졌다 일어나길 반복해 현재 피보디는 직원 240명에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에도 진출한 어엿한 중견기업이 됐다.
백색가전과 냉난방기구, 주방가전 등을 생산하는 데 가격 경쟁력보다 디자인과 품질에 집중한 피보디의 제품은 시장에서 확실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민자로서 제겐 늘 정체성이 고민이고 과제였어요. 회사도 마찬가지로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많이 고민했고 아르헨티나 고급 인력을 활용해 디자인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죠."
최근엔 물을 끓여주는 스마트 보온병을 출시해 주목을 받았다. 마테차를 늘 휴대하며 마시는 현지 문화에 맞춰 찬물만 넣고 나와도 컵과 빨대까지 장착된 보온병에서 손쉽게 마테를 마실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개발에 4년이 걸린 스마트 보온병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했다. 최 대표는 다른 나라엔 없는 이 보온병으로 미국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불체자에서 혁신제품을 만든 회사 대표가 된 그의 이야기는 현지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졌다.
피보디를 더 알리기 위해 최 대표가 나서 자신의 스토리를 홍보하기도 했지만, '푸에르테 아파체'라는 악명높은 빈민촌에서 자란 이민자가 잘 알려진 기업 대표가 됐다는 사실은 사회적 상향 이동이 쉽지 않은 아르헨티나에선 꽤 놀라운 일로 여겨졌다.
언론 인터뷰나 강연에서 '성공 비결'을 물으면 그는 끊임없는 경쟁 속에 자신의 최선을 발휘하는 일에 익숙해진 한국인의 특성을 자주 언급한다. 일찍 한국을 떠나온 최 대표도 부모님 밑에서, 그리고 한국기업에서 그런 DNA를 발현했다.

10대 때 대통령궁에 손편지를 들고 갔을 때처럼 사업하다 불합리한 일이 생기면 시장, 주지사, 장관, 대통령에게까지 수도 없이 호소했다. 그런 '악착같음'은 현지에서 흔한 덕목은 아니었다.
코로나19 위기로 아르헨티나 경제가 올스톱 됐을 때도 그는 "저소득층을 위한 난방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 남들보다 일찍 공장 가동 허가를 받았고, 경쟁업체들이 공장을 멈춘 사이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대신 공장에서 산소호흡기도 함께 만들어 절반 가까이를 기증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며 회사를 키워갔지만, 아르헨티나 경제가 워낙 출렁이는 데다 불체자 시절의 불안감을 몸이 기억하는 탓인지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최 대표는 "난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한 사람"이라며 '성공한 기업인'이라는 표현을 주저했다.
"내가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도 아니다"라며 손사레를 쳤지만, 수없는 인생의 파도를 넘어본 사람으로서 "언제나 성실하게, 최선·최상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몸소 겪은 진리를 전했다.
mihy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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