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 베네디티스 나폴리대 교수, 유창한 한국어 구사로 한국어 교재까지
"'가난한 나라' 연구하느냐" 반대도…"한국, 작지만 세계 매혹하는 힘"
[※ 편집자 주 : '비아 로마나'(Via Romana)는 이탈리아어로 '로마의 길'이라는 뜻으로, 이탈리아 현지의 숨겨진 인물이나 이야기를 찾아 전하는 특파원 연재 코너입니다.]
(나폴리=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보기 드물게 한국어가 유창한 이탈리아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실제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흠잡기 어려운 발음에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고 한국 역사·문화 전반에 대한 지식은 여느 토종 한국인 못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한국학의 산실로 불리는 나폴리동양학대 안드레아 데 베네디티스(43) 교수 얘기다.
1일(현지시간) 대학 연구실에서 마주한 데 베네디티스 교수는 '한국어 실력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언어에 소질도 있는 것 같다"라면서 다소 싱거운 답을 내놨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나폴리동양학대에 다니던 2000년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한국에서 1년간 지내면서 다져졌다.
수다스러운 하숙집 아줌마가 그의 훌륭한 한국어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매일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하면서 듣고 말하는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에는 한국문학을 탐독하면서 어휘력과 표현력을 길렀다. 20년 뒤 그 결과는 '가장 한국어를 잘하는 이탈리아인 한국학 교수'라는 타이틀로 돌아왔다.
40대 초반의 젊은 학자이지만 이탈리아의 한국학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현지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이가 드물 정도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인기 한국어 교재도 그가 집필했다. '린구아 코레아나'(Lingua Coreana·한국어)라는 제목으로, 2014년 1권이 나온 이래 5년에 걸쳐 4권까지 출간됐다.
데 베네디티스 교수는 "처음에는 '팔릴 책이 아니다'라며 거절하는 출판사 사장을 설득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책을 더 내자고 조른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의 말마따나 요즘 이탈리아에서는 한국어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올해 240명이 나폴리동양학대 한국학과에 입학했다. 1959년 학과 개설 이래 최대 규모다. 학생 수 기준으로는 대학에 개설된 비유럽어권 40여 개 외국어 가운데 일본어·중국어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고 한다.
이탈리아에 한류가 본격 상륙하기 전인 2016년 50∼60명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놀랄 만한 증가세다.
단기간에 학생 수가 급증하면서 교수진·강의실 부족 문제와 같이 행복한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학생이 몰리다 보니 학과 내부적으로 수업의 질을 고려해 정원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올 정도라고 한다.
이처럼 한국어의 인기와 인지도가 급상승한 배경으로는 역시 K팝이나 K드라마 등과 같은 '한류'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실제 많은 학생이 인터넷 등을 통해 접한 한국문화의 매력을 입학 동기로 꼽는다.
한류의 인기에 더해 데 베네디티스 교수와 같은 실력 있는 젊은 학자가 있었기에 이를 한국학의 부흥으로 연결 지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단순한 이유로 한국학과에 온 학생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역사와 문학 등으로 관심 폭을 넓히고 한국에 대한 이해를 심화한다. 이른바 '지한파'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데 베네티스 교수가 한국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대학에서 동양사를 공부하면서다. 한국사를 모르면 동양사를 더 깊이 있고 균형있게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점점 한국에 관한 연구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막상 한국사를 공부하려고 보니 자료가 너무 없었어요. 그게 오히려 더 독하게 한국사를 파고들게 된 이유가 됐습니다. 매우 중요한 학문인데 하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저에겐 '블루오션'이나 마찬가지였죠"
처음엔 부모님과 친구들의 반대도 심했다. '그 가난한 나라를 공부해서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 '졸업한 뒤에 취직이나 되겠느냐'라는 비아냥 섞인 말까지 들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한국사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은 커졌고 지도교수의 조언으로 한국 고대사까지 연구 영역을 넓혔다.
당시 그를 한국 고대사로 인도한 이가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의 1세대 한국학 전문가로 꼽히는 마우리치오 리오토(62) 현 안양대학교 교수다.
데 베네티스 교수는 이후 나폴리동양학대에서 '신라 화랑도 연구'로 석사를, 로마 라사피엔차대에서 '고구려 벽화에서 본 고구려인의 생사관'이라는 논문 주제로 박사 학위를 각각 받고서 한국학을 평생 업으로 삼았다.
2011년 카 포스카리 베네치아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2018년 지금의 나폴리동양학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사이 부모님은 열렬한 후원자가 됐다. 친구들도 10대 자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K팝과 드라마를 즐겨보는 팬층으로 변했다고 한다.
요즘은 "그때 선택 잘했다"는 부러움섞인 덕담까지 건넨다고 한다.
그는 한국 문학을 현지에 소개하는 전문 번역가로도 활약한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김영하의 '빛의 제국'·'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살인자의 기억법', 황석영의 '바리데기'·'한씨연대기'·'낯익은 세상'·'개밥바라기별' 등의 작품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지금은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번역 중이다.
통상 1년에 10권 정도 번역 의뢰를 받지만 강의와 연구 등으로 시간을 내기 쉽지 않다고 한다. 최근에는 권위 있는 출판사도 수시로 연락해올 만큼 한국 문학이 인기라고 그는 전했다.
데 베네티스 교수는 한국학의 성장 잠재력은 여전히 크다고 전망했다. 한국의 문화적 매력이 살아있는 한 한국학을 찾는 사람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설명한다."미래 한국학의 성패는 결국 한국의 '소프트파워' 역량에 달려있습니다. 한국은 작지만 세계를 매혹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도전정신이 강하고 무엇이든 예쁘게 포장하는데 타고난 재능을 가진 한국인이 앞으로도 지속해서 세계를 뒤흔들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낼 거로 생각합니다. 한국학의 저변도 그만큼 넓어지겠죠"
최근 한국에서 공부하는 이탈리아 젊은 학생이 많이 늘어난 것도 한국학 발전에 긍정적인 요인이다.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한국학의 위상이 확고해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데 베네티스 교수는 기대했다.
그 역시 학자로서 궁극적인 목표를 역량 있는 후학 양성에 두고 있다.
그는 "대단한 연구 업적보다는 차세대 한국학 연구자를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우수한 연구자가 지속해서 나올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다지는 데 더 힘을 쏟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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