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일본인'으로 부려 먹고 끝내 외면…이중잣대

입력 2021-12-04 07:07  

[특파원 시선] '일본인'으로 부려 먹고 끝내 외면…이중잣대
한국인 전범 최후 생존자 故이학래 씨를 회고하며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최근 이학래(1925∼2021) 씨를 추모하는 사진전에 갔다가 일본의 이중 잣대를 실감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됐다가 전범의 멍에를 지고 평생 부조리와 싸운 인물이다.
일본의 '감탄고토'(甘呑苦吐·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정책 때문에 질곡의 연속이었던 고인의 삶을 돌아본다.
전남 보성 출생인 이씨는 17세이던 1942년 일본군의 포로를 감시하는 군속(軍屬, 군무원에 해당)으로 태국의 포로수용소에 배치됐다.

감시원 '모집'이라는 형식적 절차를 거쳤으나 자유로운 선택이 존중됐다고 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씨에게는 일본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포로 학대 혐의로 기소됐고 싱가포르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감형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풀려나기까지 약 11년의 구금 생활을 견뎌야 했다.
일본은 이씨와 같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전쟁터에 투입해놓고 패전 후에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1953년 옛 일본군과 군무원 등에 대한 연금의 일종인 '온큐'(恩給) 지급을 시행하면서 이씨 등을 애초 수혜 대상에서 제외해 버린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에 앞서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하자 조선인과 대만인 등 앞서 자신들이 일본인으로 간주했던 식민지 출신자의 일본 국적을 실효시켰다. 일본 국적 보유가 연금을 받는 전제 조건이었다.

적어도 일본에 머물던 조선인에게는 국적 선택권을 주는 것이 인도적 조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 정부는 당사자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국적을 박탈해 버렸다.
일제에 의해 일본인 신분으로 전쟁에 동원됐고, 일본인 전범으로 처벌까지 받았는데도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일본이 국가적 책임을 회피한 셈이다.
전쟁 범죄자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조선인은 선뜻 조국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았다. '일제 협력자'라는 따가운 시선에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거나 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처형을 면했지만, 그와 비슷하게 동원된 조선인 중 23명은 사형됐다.
BC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조선인은 148명이다.

이씨는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의 몫까지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백방으로 뛰었다.
스가모 감옥에 구금돼 있던 시절부터 '동진회'(同進會)라는 단체를 만들어 문제 해결을 시도했고 일본 시민·지식인들과 함께 운동을 벌였다.
역대 총리 30명에게 서한을 보내 문제 해결을 촉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국인 전범 문제는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과 별개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사실관계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공개하고 있는 기록물을 보면 1952년 2월 4일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한일 회담 회의에서 한국 측이 스가모(巢鴨)형무소에 복역 중인 한인 전범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방침을 물었더니 일본 측은 '그것은 별개 문제이니 별도 연구할 것'이라고 답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한국 측 기록에 나온 것처럼 답한 것이 사실이냐고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穗) 일본 참의원 의원의 2006년 6월 질의했더니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내각은 "현재 외무성에서 파악하는 한 지적한 것과 같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일본 정부는 관련 문서 공개도 적절하지 않다고 반응했다.
이씨는 오랜 시간 법정에서 싸웠다.
문태복 씨 등 전범으로 처벌받은 이들 및 유족과 함께 1991년 11월 12일 도쿄지방재판소(지법)에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소장을 제출한 것이 시작이었다.

1심 법원은 약 5년 후인 1996년 9월 이씨 등의 청구를 기각했다.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2심 법원도 외면했다.
1999년 12월 일본 최고재판소가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하면서 8년여에 걸친 법정 투쟁이 종료했다.
재판이 진행 중인 동안 문씨 등 원고 3명이 세상을 떠났다.
포기하지 않고 뜻있는 정치인을 설득해 입법을 통한 해결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예를 들어 2008년 한국인 전범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법안이 일본 중의원에 제출됐지만, 심의를 거치지 않고 폐기됐다.
가장 어린 나이에 동원돼 한국인 전범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씨는 올해 3월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이중잣대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한국인 전범 문제 해결을 위해 이씨와 함께 활동한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오사카(大阪)경제법과대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은 일본 측이 "식민지 시대 문제를 일절 모른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서 이씨가 "(일본이) 자신의 형편에 유리하도록 그때그때 일본인 혹은 조선인으로 구분해서 취급한 것에 대한 분노"를 생전에 표명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동진회와 이씨의 부인 강복순(86) 여사는 지난달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것을 촉구하는 요망서를 일본 내각부에 제출하는 등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계속 활동 중이다.

한국 측도 조선인 전범 문제의 해법을 내놓지 않았다.
이씨는 한국 정부가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에 관해 대응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2014년 10월 한국에서 헌법 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헌재는 7년 가까이 시간을 끌다 이씨가 세상을 떠난 후인 올해 8월 각하 결정을 내렸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한국인 전범을 2006년 강제 동원 피해자로 인정한 바 있다.
sewonl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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