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비 상승에도 한차례 인상 그쳐…요금 합리화 '난망'
(서울=연합뉴스) 윤보람 기자 = 정부와 한국전력[015760]이 20일 내년 1분기 전기요금을 동결하기로 한 것은 물가 상승에 대한 정부 부담이 워낙 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연료 가격이 급등해 전력 생산 비용이 상승했지만, 이를 요금 인상으로 메워 물가를 자극하기보다는 일단 한국전력이 부담을 떠안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물가 상승 우려는 잠재웠으나 한전의 경영난 심화에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기요금 합리화를 목적으로 도입된 연료비 연동제가 유명무실해졌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게 됐다.
전기요금은 연료비 연동제에 따라 액화천연가스(LNG), 석탄, 유류 등 전기 생산에 들어간 연료비 변동분을 3개월 단위로 반영해 결정된다.
내년 1분기 전기요금의 연료비 조정단가는 올해 4분기와 같은 kWh당 0.0원으로 책정돼 소비자들의 체감 요금은 전 분기와 동일하다.
내년 1분기 평균 실적연료비(9∼11월 평균 연료비·세후 기준)는 ㎏당 유연탄이 평균 181.81원, LNG는 832.43원, BC유는 661.27원이다.
올해 4분기 때보다 유연탄은 30원 이상, BC유는 86원 이상 각각 올랐으며 LNG는 무려 230원 이상 상승했다.
4분기 실적연료비의 3분기 대비 증가분이 유연탄 17원 이상, BC유 53원 이상, LNG 110원 이상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상승 폭이 훨씬 커진 것이다.
이런 연료비 증가분을 반영한 내년 1분기 연료비 조정단가는 kWh당 29.1원으로 산정됐다. 따라서 상한선인 3.0원만큼 올랐어야 하지만, 정부가 유보 권한을 발동하면서 0.0원으로 동결했다.
앞서 정부와 한전은 연료비 연동제를 처음 적용한 올해 1분기에 연료비 조정단가를 kWh당 3.0원 내렸다.
이후 2분기와 3분기에는 연료비 상승으로 전기료 인상 요인이 생겼음에도 높은 물가상승률과 국민 부담을 고려해 1분기와 같은 수준(-3.0원)으로 요금을 묶어놨다.
연료비가 계속 고공행진을 하자 4분기에는 결국 연료비 조정단가를 kWh당 0.0원으로 책정해 전 분기보다 3.0원 올렸다. 결국 작년과 비교하면 연료 가격이 급등했음에도 전기요금은 제자리걸음을 한 셈이다.
내년 1분기 전기요금을 동결한 데는 물가상승 우려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지난달 소비자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3.7% 오르며 2011년 12월(4.2%)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나타냈다. 내년에도 글로벌 공급망 차질과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물가 상승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상품·서비스의 원재료인 전기요금을 올리면 다른 물가를 자극할 수 있어 물가 상승세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란 우려가 정부 내에서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 역시 이날 요금 동결 배경에 대해 "국제 연료가격이 급격히 상승한 영향으로 조정 요인이 발생했으나 코로나19 장기화와 높은 물가상승률 등으로 국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유보한다고 정부로부터 통보받았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서민 가계에 부담을 가중하는 정책을 추진하기에 부담스러운 정무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올해 4분기 요금을 일단 한차례 올렸기에 다음 분기는 동결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덜했을 수 있다.
문제는 전력 생산 원가를 요금에 반영하지 못하면서 한전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한다는 점이다.
한전은 정부의 유보 권한 발동과 인상 폭 제한에 따른 연료비와 전기요금 간 괴리로 지난 3분기 1조1천298억원의 누계 영업적자를 냈다.
한전 내부적으로 예상한 올해 영업손실 규모는 4조3천845억원에 달한다.
공기업 부채는 결국 국민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만큼 인위적인 요금 동결은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격'이란 지적이 나온다. 현재의 책임을 미래 세대에 전가한다는 비판도 있다.
아울러 전기요금 합리화라는 당초 취지와 달리 연료비 연동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전력 시장 규제에 대한 정부 정책의 신뢰도 역시 타격을 입게 됐다.
정부는 2011년에도 연동제를 도입했으나 유가 상승기와 맞물려 시행을 미루다 2014년 폐지한 전례가 있다.
계속되는 요금 인상 억제는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 기조와도 엇갈린다.
전력 전문가들은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 이행을 위해 선진국 대비 저렴한 요금을 단계적으로 인상해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고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투자에 활용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김종갑 전 한전 사장은 지난 16일 자신의 페이스북 글에서 "공공요금 통제로 물가를 잡겠다는 개발연대식 정부개입을 그만둘 때"라며 "정부는 요금 인상을 통제하며 (국민) 부담을 줄여준다고 생색을 내지만, 나중에는 차입 원리금까지 포함해 더 많이 부담하게 된다는 점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비판했다.
bryoo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