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이탄광 해저갱도 누수 반복에도 작업 강행…日시민단체 자료·증언 수집
일본 내 모금으로 '강제연행·사과·반성' 기록한 추도 시설 마련
(우베[일본 야마구치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에 동원된 조선인 136명이 해저 탄광에서 목숨을 잃은 지 3일 80년이 됐다.
조선인을 포함해 183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는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 앞바다에 있던 조세이(長生)탄광 해저 갱도에서 발생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후 두 달가량 지난 1942년 2월 3일 오전 해저 갱도 내부로 바닷물이 밀려들면서 작업 중이던 이들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희생자 유해 수습 등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현지 시민단체 '조세이탄광 물비상(水非常·수몰사고)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모임)은 사고 당일 오전 6시 무렵에 침수가 시작돼 오전 9시 30분 무렵 참사로 번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임이 발간한 증언·자료집에 의하면 이상 징후는 사고 훨씬 전부터 있었다.
진주만 공습 직전인 1941년 11월 30일 갱도에서 누수 현상이 있었다.
이후에도 물이 새거나 스며드는 일은 반복됐지만, 작업자를 보호하는 제대로 된 조치 없이 탄광 측은 작업을 강행했고 결국 비극으로 이어졌다.
조세이 탄광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이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어선이 지나가는 소리가 갱도에서 들릴 정도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갱도가 얕아서 애초에 붕괴 위험이 큰 해저 탄광이었던 셈이다.
조세이탄광 수몰 사고는 희생자가 특히 많은 대형 사고였음에도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언론이 사고 소식을 작게 다루고 심지어 사실과 다르게 보도한 것이 한 원인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야마구치현 일대에 배달된 아사히(朝日)신문은 사고 다음날 조간에서 '조세이탄광의 침수사고'라는 제목의 1문장짜리 단신 기사로 다뤘다.
여기에는 "배수 작업 등 응급조치를 강구하고 있고 입갱자 대부분을 구출했으나 여전히 잔류 약간 명의 생사는 불명"이라는 설명이 담겨 있다.
모임의 공동대표인 이노우에 요코(井上洋子) 씨는 아사히신문 도쿄판을 포함해 다른 신문의 경우 대체로 200명 정도가 생사를 알 수 없다고 보도했지만, 아사히신문 야마구치판만 대부분 구출됐다고 거짓 정보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 중에 석탄 산업은 매우 중요한 산업이었다. 여기서 폭동이 일어나면 큰일이므로 이것을 감추려고 한 것이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한국 정부가 한시 조직으로 운영했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앞서 내놓은 보고서에서 조세이탄광이 전시 노동력 동원 체제를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했으며 조선인 노무자 강제 동원이 그 중심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위원회는 조세이탄광은 노동 조건이 가혹하고 위험해 광부 모집이 어려웠다면서 "탄광 측이 해저탄광의 위험성에 무지하고 순박한 조선인 노무자"를 동원했다는 견해를 함께 소개했다.
조세이탄광이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사실상 문을 닫은 가운데 사고 수습과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나중에 모임 회장을 지낸 야마구치 다케노부(山口武信·1931∼2015) 씨가 1976년 '조세이탄광에서의 물비상- 쇼와(昭和)17년(1942년) 조세이탄광재해에 관한 노트'라는 논문을 내놓은 것이 일제 강점기 해저 탄광 참사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91년 3월 뜻있는 시민 30명이 참석한 가운데 모임이 발족했다.
당시 이들은 사고 관련 증언·자료 수집, 사고 현장에 남아 있는 '피야'(ピ?ヤ)라고 불리는 배기·배수용 콘크리트 구조물 보존, 일본인으로서의 사죄 및 희생자 전원의 이름을 새긴 비석 건립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후 모임은 남북한에 있는 희생자 본적지에 편지 118통을 보낸 끝에 유족과 교류를 시작했고 1992년 5월 한국에서 유족회가 결성됐다.
모임은 같은 해 8월에 한국 유족을 초청한 것을 시작으로 1993년부터 매년 2월 3일을 전후로 한국인 유족을 사고 현장 인근으로 초빙해 추도식을 열었다.
일본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겠다며 외국인의 입국을 사실상 금지해 작년부터 한국인 유족이 현지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모임은 애초에 세웠던 목표를 상당 정도 달성했다.
증언·자료집을 3권 펴냈고, 일본에서 모금 활동을 벌여 '강제 연행 한국·조선인 희생자'라고 새긴 추도비를 2013년 설치했다.
추도비가 설치된 '조세이탄광 추도 광장'에는 방문자들이 가해의 역사를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전시물이 배치됐다.
예를 들어 추도문에는 "식민지 지배 정책 때문에 토지·재산 등을 잃어버려, 부득이 일본으로 일거리를 찾으러 건너오거나, 혹은 노동력으로서 강제 연행되어 온 조선인"이라는 희생자에 관한 설명이 한글과 일본어로 기재됐다.
여기에는 "특히 조선인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는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과의 마음을 올립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비극을 낳은 일본의 역사를 반성하고, 다시는 다른 민족을 짓밟는 포악한 권력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여기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깁니다"라는 다짐도 적혀 있다.
모임은 유족의 바람을 수용해 희생자 유골 수습과 반환을 2013년에 새로운 목표로 세웠다.
일본과 적극적으로 교섭에 나서라고 한국 정부에 촉구했으나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는 상황이며 일본 정부는 모임의 요구에 제대로 반응하고 있지 않다.
이노우에 공동대표는 유해 발굴 및 반환을 달성하려면 우선 일본 정부가 나서야 하지만 한국 정부의 협력도 필요하니 양국이 공동사업으로 추진하고 이 과정에서 우호를 증진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모임은 유해가 발굴됐을 때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한일 양국 유족이 27명의 DNA를 채취해 놓았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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