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를 가다]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하루 6번 사이렌

입력 2022-03-23 08:00   수정 2022-03-23 09:46

[우크라를 가다]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하루 6번 사이렌
인구 25만 소도시 체르니우치에 피란민 5만3천 명 몰려들어
전쟁으로 민간용품 생산·유통 차질…한국 기업도 피해
체르니우치 부지사 "전쟁으로 국민 단합돼…전쟁 끝나면 한국처럼 발전할 것"



(체르니우치[우크라이나]=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또 사이렌이 울린다. 22일(현지시간) 하루에만 여섯 번, 전날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이후로는 일곱 번째 듣는 공습경보다.
처음에는 사이렌이 울리는지도 몰랐다. 긴가민가해서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공습경보(Air Raid Alert)가 맞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의 사이렌 소리는 한국과 사뭇 달랐다. 한국에서는 고음역의 사이렌이 날카롭게 울린다면, 우크라이나에서는 저음역의 낮은 경고음이 멀리 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지인도 사이렌을 잘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주로 공습경보 알림 앱을 이용한다.
앱을 확인해보니 이날 오전 7시와 오후 1시 30분, 3시 20분, 5시 30분, 7시 50분, 8시 30분께 우크라이나 남서부 체르니우치에 공습경보가 발령됐다.
적 미사일이나 폭격기의 직접적인 타격 대상이 아니더라도 인근에 적대적으로 판단되는 비행물체가 있거나 그 예상 경로에 포함된다면 해당 지역에 공습경보가 내려진다고 한다.



사이렌이 울리는데도 체르니우치 시민들은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도로에는 차가 달렸고, 시민들은 차분히 신호등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넜다.
벤치에 앉아 있던 드미트로 씨에게 태연한 까닭을 물었다.
그는 "미사일이 내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면 어디에 숨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라며 "지금 우크라이나에서는 어디에 있든 죽을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언론에 사흘간 취재가 허락된 체르니우치는 루마니아 국경과 맞닿은 소도시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북부와 동부, 남부와는 달리 서남부의 체르니우치에는 개전 이후 한 번도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피란민이 체르니우치로 몰려들었다. 평상시 이곳의 인구는 약 25만 명이지만, 개전 후 약 5만3천 명의 타지인이 체르니우치 시청에 피란민으로 등록했다고 한다.
이날도 체르니우치 시청에는 피란민 등록을 하기 위해 온 타지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또 체르니우치 곳곳에서 다른 지역에서 온 차량이 눈에 띄었다.
체르니우치 주(州)에 등록된 차량의 번호판은 'CE'로 시작하지만, 거리에서 목격한 차량의 3분의 1가량에는 다른 지역 번호판이 달려있었다.
평시라면 다른 지역에서 온 차를 볼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외지에서 온 차 가운데 일부에는 뒷유리창에 러시아·우크라이나어로 '어린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피란길에 러시아군과 마주칠 때를 대비해 어린이가 타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붙인 종이다.
그러나 이런 종이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러시아군은 지난 16일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어린이를 포함한 수백 명의 민간인이 대피한 극장을 폭격했다.
당시 극장 앞·뒷마당에도 크게 '어린이'라고 적혀있었다.
직접적인 피해를 본 적은 없는 이곳도 전쟁의 여파를 완전히 피해 가지는 못한 듯했다.
상점의 매대 중 일부는 텅 비어있었다. 빵이나 물 등 식음료는 비교적 사정이 나아 보였지만, 공산품 판매대에는 곳곳에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전쟁으로 민간용품의 생산·유통에 차질이 빚어진 탓이다.
한국 기업 역시 전쟁으로 피해를 보고 있었다.
번화가에 자리 잡은 삼성전자 매장은 폐쇄된 상태였다. 외부 유리창에 지난달 판매를 시작한 최신 휴대전화인 갤럭시 S22 광고가 붙어있는 것을 볼 때 비교적 최근 문을 닫은 듯했다.
주우크라이나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갈등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자 지난 1월 말 대부분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했다고 한다.



불편한 생활이 이어지자 주민들도 잔뜩 예민해진 듯했다.
체르니우치 시내 아파트에 머물던 취재진을 보고 이웃 주민이 갑자기 수상한 외국인이 들어왔다며 신고해 경찰이 출동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래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를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놓지 않는 듯했다.
체르니우치 외곽의 구호물품지원센터에서 만난 자원봉사자 중 상당수는 타지에서 온 피란민이었다.
구호물품지원센터는 루마니아를 통해 반입된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 물품을 분류해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운송하는 물류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체르니우치에서는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으로 꼽히는 탓에 무장병력이 상주해 있었으며, 건물 위치가 노출될 수 있어 외부 촬영도 불가능했다.
이곳의 자원봉사자들은 한목소리로 전선에서 싸울 수는 없지만, 나라를 지키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고 했다.



이곳을 책임지는 보흐단 코발리크 체르니우치 주 부지사는 "전쟁이 우크라이나를 뭉치게 했다"고 말했다.
코발리크 부지사는 "전쟁 전에는 자신의 이익과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행동했지만, 전쟁 이후로는 모든 사람이 오직 승리만을 위해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우크라이나는 단합된 힘을 바탕으로 전보다 더 발전할 것이라며, 그 실제 사례로 한국을 언급했다.
"우리는 한국을 좋아합니다. 한국은 끊임없이 군사적 위협을 받으면서도 민주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통합하고 국가를 발전시킨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발전시켜야 하지만, 언제든 우리를 공격하려는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과 비슷한 길을 가는 것이 우리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격을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kind3@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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