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영국 일간지와 인터뷰…우크라이나 검찰 공식 수사 개시
(파리=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서부 테르노필로 도망친 나탈리야(33·가명)는 혹시나 어린 아들(4)이 들을까 걱정된다며 수화기 너머로 남편(35)을 죽이고, 자신을 성폭행한 러시아 군인들의 만행을 숨죽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날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르는 야만적인 행위를 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28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더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단란했던 가족이 풍비박산 나버린 비극을 어렵사리 끄집어냈다.
자연과 가깝게 지내고 싶었던 나탈리야와 남편은 키이우 동쪽 외곽 브로바리에 있는 작은 마을의 소나무 숲 옆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키이우 점령을 목표로 하는 러시아군이 지난 8일 브로바리에 진입했다는 소식에 부부는 민간인 표식으로 문 앞에 하얀 시트를 걸어놨었다.
그런 행동이 무색하게도 다음 날 아침 총성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손을 머리 위에 들고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여러 명의 군인과 총에 맞아 죽은 강아지가 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장면을 봤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사람이 사는 줄 몰랐다'고 해명했고 "흔히 알려진 이야기처럼 자신들은 '훈련을 하러 가는 줄 알았지, 전쟁에 투입되는 줄 몰랐다'고 늘어놨다. '비탈리'라고 불리는 한 군인은 사실 자기도 고향에 키우는 개가 있다며 강아지를 죽여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나탈리야에게 전쟁만 아니었으면 당신과 연애를 했을 것이라고 추파를 던진 '미하일 로마노프'라는 사령관은 남편의 차에서 위장 재킷을 발견하고 나서 공격적으로 변했고, 나탈리야의 차를 빼앗아 나무로 돌진시켜 박살 내 버리고 집을 떠났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끝난 줄 알았으나 끝이 아니었다. 해가 지고 나서 집 밖이 소란스러워졌고, 남편이 상황을 파악하러 밖에 나갔다. 곧바로 총소리가 들렸고, 집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떠났던 로마노프가 검은색 제복을 입은 20대 남성과 함께 돌아온 것이었다.
남편은 어디에 있느냐고 울부짖던 나탈리야는 창문 밖으로 문 옆에 쓰러져 있는 남편을 발견했다. 20대 남성은 나탈리야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며 "당신의 남편은 나치이기 때문에 내가 총으로 쐈다"고 말했다. 나탈리야는 곧바로 아들에게 보일러실로 숨으라고 외쳤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던 나탈리야는 러시아 군인이 "입을 다물지 않으면 당신의 아들을 데려와서 엄마의 뇌가 집안 곳곳에 펼쳐진 것을 보여주겠다"고 협박하고 머리에 총기를 겨눈 채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말할 때 처음으로 목소리가 흔들렸다고 더타임스는 묘사했다.
러시아 군인들은 나탈리야의 집을 세 차례 왔다 갔다 하면서 나탈리야를 성폭행했다. 마지막으로 집에 왔을 때는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 모두 의자에 앉아 잠들었다. 그 순간을 틈타 나탈리야는 아들을 데리고 황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남편의 시체가 있는 마당을 지나가야 했지만, 주변이 어두웠기 때문에 아들은 그 사람이 아빠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아들은 "우리도 여기에 있는 이 사람처럼 총을 맞게 될까?"하고 나탈리야에게 물었다. 아들은 여전히 아빠가 살아있다고 믿고 있다.
나탈리야가 아들과 함께 도망친 테르노필에서 만난 남편의 누이가 나탈리야를 경찰서로 데려갔다. 나탈리야는 소셜미디어(SNS)에서 자신을 성폭행한 로마노프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함께 범행을 저지른 군인은 파악하지 못했으나, 그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군이 조직적으로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이리나 베네디코바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은 지난주 나탈리야의 남편을 살해하고, 나탈리야를 성폭행한 러시아 군인들에 대한 공식적인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안타깝게도 남편의 시신은 아직 수습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이 여전히 마을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탈리아는 "앞으로 이 모든 것들을 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남편이 우리를 위해 지은 이 집만큼은 도저히 팔 수 없을 것 같다"고 털어놨다.
run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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