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뒤 역사] 뉘른베르크 재판서 "침략은 범죄" 주장한 소련

입력 2022-04-12 07:30   수정 2022-04-14 23:49

[뉴스 뒤 역사] 뉘른베르크 재판서 "침략은 범죄" 주장한 소련
같은 원칙 따른다면 푸틴 쉽게 단죄…ICC도 '침략의 범죄' 명문화
'힘의 논리' 지배하는 국제사회…실제 적용은 쉽지 않아

[※편집자 주 : '뉴스 뒤 역사'는 주요 국제뉴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건, 장소, 인물, 예술작품 등을 찾아 소개하는 부정기 연재물입니다.]



(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중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주거지와 민간시설 파괴, 성폭행 등을 전쟁범죄로 처단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을 이유로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처벌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전쟁터에서 일어난 각종 범죄를 그가 직접 지시했거나 최소한 묵인, 방조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입증 가능성 측면에서 푸틴을 가장 신속하고 확실하게 단죄할 수 있는 죄목은 '침략의 범죄'(crime of aggression)다. 침략이 개인에게 형사 책임을 지울 죄가 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가 적지 않겠지만 무려 80여년 전에 실제로 침략의 범죄를 적용해 전쟁을 주도한 개인들을 처벌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침략의 범죄에 관한 논리를 수립하고 이를 전범재판에 적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관철한 나라는 바로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이었다.
1945년 11월 국제군사재판소(IMT)는 당시 생존해 있던 나치 독일의 최고위급 전쟁범죄 책임자 24명에 대한 재판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시작했다. 1년 가까이 진행된 재판 결과 도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중병에 걸려 심리가 중단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 가운데 12명이 교수형, 3명이 종신형, 4명이 유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명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피고인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나중에 침략의 범죄로 더 많이 불리게 되는 반(反)평화 범죄(crime against peace), 전쟁 범죄(war crime), 반인류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와 음모(conspiracy) 등 4가지였다. 이는 1943년 전승을 예상한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에서 합의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연합국의 전범재판 논의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침략의 범죄였다. 다른 나라를 침략했다는 것이 죄가 되고 이에 책임이 있는 개인을 처벌한다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낯설었기 때문이다. 침략의 범죄를 나치 전범에 적용하자고 처음 제안한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에서는 이미 법학자 아론 트라이닌 주도로 침략의 범죄에 관한 이론 체계를 정비해두고 있었다.
소련 입장에서는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자국을 침략한 만큼 이 죄를 적용하는 데 필요한 실체적 근거도 충분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소련이 스스로 서구 열강의 침략에 취약하다고 판단해 이참에 침략의 범죄에 관한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IMT 재판의 원칙을 담은 뉘른베르크 헌장에 따르면 침략의 범죄는 "침략전쟁, 혹은 국제조약·합의 또는 보장 또는 공통계획의 참여에 위반하는 전쟁을 계획·준비·착수하는 행위, 혹은 앞에서 열거한 여하의 사항을 성취하기 위한 음모"라고 정의된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반인류 범죄, 특히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전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바람에 침략의 범죄는 그다지 여론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침략전쟁은 단지 하나의 국제범죄가 아니라 그 안에 집적된 악의 총체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다른 전쟁범죄와는 구분되는 최고의 국제범죄"라고 밝혔다. 22명의 피고인 전원의 기소 항목에 침략의 범죄가 포함됐으나 이에 관한 유죄 판결은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등 12명에게만 내려졌다.



오늘날 IMT와 같은 법정을 다시 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단죄한다면 같은 법리를 적용해 푸틴을 쉽게 처벌할 수 있다. 뉘른베르크 헌장은 침략의 정의를 자세히 기술하지 않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는 점은 푸틴도 반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침략도 정당화할 수 있는 경우가 있겠으나 러시아가 내세운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 등과 같은 전쟁의 명분은 쉽게 논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이 '푸틴의 전쟁'이라고 불린 데서 보듯 전쟁 개시와 수행, 그리고 앞으로 있을 종결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요한 결정이 그에게 달렸다는 점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푸틴은 패전국의 지도자가 아니다. 더욱이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침략의 범죄에 관한 국제법적 논의는 오히려 퇴보한 측면이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CC) 조약은 침략의 범죄가 ICC의 관할권에 속하는 범죄임을 명시했으나 침략국이 ICC의 관할권을 받아들이거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회부한 경우에만 이 범죄로 기소할 수 있도록 했다. 러시아는 ICC 조약 가입국도 아닐뿐더러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안보리의 어떤 결정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 전범의 단죄는 법적 근거보다도 힘의 논리에 좌우된다. 소련은 2차대전의 초입에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해 분할 점령하는 등 전쟁 중 수없이 많은 불법행위를 저질렀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처벌받기는커녕 심판자 역할을 했다. 침략이라는 점에서는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 진영의 국가들도 무고하지 않다. 2차 대전의 전범재판이 끝난 후에도 전범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은 많이 있었으나 침략의 범죄가 적용된 경우는 없었던 것이 이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ICC를 통해 푸틴을 침략의 범죄로 처벌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러시아가 나치 독일이나 일본제국과 같이 완전히 패망해 승전국의 일방적인 종전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지 않는 한 푸틴이 뉘른베르크와 유사한 전범재판을 받게 될 일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처럼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권력을 잃게 된 후 푸틴이 러시아 정부에 의해 ICC 또는 특별히 설립된 국제법정에 넘겨질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다. 푸틴이 처벌받기를 바라는 사람들로서는 이쪽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현실성이 있는 시나리오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날이 온다면 언제든 꺼내서 쓸 수 있도록 침략의 범죄라는 날이 잘 선 칼이 준비돼 있다.


cwhy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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