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현재 논설위원 = 두뇌유출(brain drain)은 통상 개발도상국 엘리트 인력이 해외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 국비로 유학을 떠난 7천500명 가운데 6%만 귀국하는 심각한 두뇌유출을 경험했다. 지금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인도ㆍ중국 등도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두뇌유출을 겪었지만, 파격적인 대우와 애국심 호소, 관련 산업에 대한 전폭적 지원 등으로 해외 두뇌를 국내로 유인하는 데 성공하면서 IT 강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젊고 똑똑한 IT 인재들이 인접국으로 빠져나가는 엑소더스가 심각하다고 한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23일 현재 5만∼7만 명, 이후 추가로 7만∼10만 명의 러시아 고급 기술 인력이 비자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인접국인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 UAE 등으로 빠져나갔거나 나갈 예정이라고 14일 보도했다. 이들은 대부분 애플, 인텔 등 글로벌 기업 소속 개발자들이거나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창업한 스타트업 창업자와 직원들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미국, 유럽 등 서방세계의 강력한 제재로 인해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고, 주요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철수하면서 이들의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이 엑소더스의 주된 이유라고 한다. 일부는 회사에서 집단 철수시킨 경우도 있지만, 자산 가치가 폭락하고 글로벌 영업 자체가 불가능해지면서 생존을 위한 자발적 탈출을 감행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미하일 미슈스틴 러시아 총리는 지난주 의회 연설에서 "조국은 당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정상적으로 일하고 돈 벌고, 안락하게 살 수 있다"며 감세, 징집 면제 등 특혜를 제공하며 출국 자제를 당부했지만 엑소더스를 멈추기엔 역부족이다. 한 IT 업계 관계자는 NYT에 "푸틴이 계속 집권한다면 글로벌 고립이 지속될 수 밖에 없다"며 "우리의 장래는 계속 어두울 것"이라고 했다. 콘스탄틴 소닌 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는 "할 수만 있으면 국외로 떠나려 했던 1990년대(소 연방 붕괴 직후)와 흡사한 상황"이라며 "엑소더스로 인해 러시아의 테크 산업은 10∼15년가량 후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푸틴은 과거 미국과 대등한 경쟁을 펼쳤던 구소련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가장 안전하고 빠른 메시지 앱 '텔레그램'과 검색포털 '얀덱스'의 모국인 러시아가 기술 후진국으로 전락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국가든 기업이든 인재가 빠져나가면 망하고, 모여들면 흥하는 법이다. 인재를 키우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잃는 것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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