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깃발' 펼쳐 러 영웅된 우크라 할머니 "푸틴, 전쟁 멈춰야"

입력 2022-05-30 12:06  

'붉은깃발' 펼쳐 러 영웅된 우크라 할머니 "푸틴, 전쟁 멈춰야"
옛 소련기 짓밟는데 항의한 영상 인기끌자 러시아의 선전전에 악용돼
WSJ 인터뷰에선 "소련과 러시아는 별개…소련 깃발은 2차대전 멈춘 사랑의 깃발"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옛 소련의 붉은 깃발을 흔드는 모습이 찍힌 영상으로 러시아에서 인기를 끌며 각종 선전전에 동원된 우크라이나 60대 할머니가 미국 매체와 인터뷰에서 이번 전쟁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 할머니는 소련과 러시아는 별개라면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번 전쟁을 명령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29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개전 후 수주가 지난 시점이었던 3월 어느 날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 외곽 마을 주민 안나 이바노바(69)는 자신의 집을 지나는 자국 병사들을 보고 나와 옛 소련 국기를 펴들었다.
러시아군 병사들인 줄 알고 환영하려던 것이라고 한다.
그는 "당신과 푸틴,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말을 꺼냈지만, 병사들은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고 말한 뒤 이바노바에게서 깃발을 받아 땅에 내려놓고 짓밟았다.
분노한 이바노바는 "우리 부모님은 이 깃발 아래서 싸웠는데, 당신들은 그걸 짓밟고 있다. 깃발을 내게 돌려달라"고 외치며 병사들이 그를 달래려 건넨 식료품을 뿌리쳤다.
현장에 있던 병사가 이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이후 소셜미디어에 올라갔는데, 러시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이바노바는 '안나 할머니'란 별명이 붙은 채 러시아 선전전의 핵심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군을 장악한 신나치 세력으로부터 동부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하려고 '특별 군사작전'을 일으켰다는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집권층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여겨졌던 까닭이다.
러시아 당국은 자국과 우크라이나 점령지 곳곳에 옛 소련기를 든 이바노바의 모습을 딴 동상과 벽화, 간판 등을 설치했다.
러시아군의 포위 공격으로 2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마리우폴에도 이달 초 이바노바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러나 WSJ 기자를 만난 이바노바는 선전전에서 표출된 이미지와 달리 이번 전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푸틴에게 전화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들과 우리의 아들 중 누구도 죽어야 하지 않도록 전쟁 없이 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왜 불가능했느냐고"라고 말했다.
그는 "이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에 막대한 재앙"이라면서 "우리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무엇을 했기에 우리를 죽여야만 하는가?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한 것이지, 우크라이나는 그들을 건드린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바노바는 과거 소련 체제에 익숙한 평범한 우크라이나 할머니지만 1991년 소련 붕괴의 여파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자유와 새로운 기회를 얻은 대도시 시민들과 달리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인 돈바스 지역의 노동자였던 그와 지인들은 실직한 채 경제난과 급증한 범죄, 부정부패 등으로 신음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네 자녀 중 2명이 피살됐고, 나머지 둘도 화재와 폐렴으로 잇따라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와 형제는 난방할 돈이 없어 동사했고, 다른 형제 한 명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처리 작업에 동원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런 그에게 옛 소련은 훨씬 살기 좋았던 시절로 기억된다.
이바노바는 자신이 소중히 보관해 온 옛 소련 깃발은 푸틴 대통령이나 전쟁 지지와는 무관하다면서 "나에게 이건 2차 세계대전을 끝낸 평화의 깃발이다. 이건 악의 깃발이 아니라 사랑의 깃발이다"라고 강조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바노바는 불과 몇 ㎞ 거리에서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이 포격전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마을에 남은 채 교회에서 전쟁이 빨리 끝나길 기도하고 있다고 WSJ은 전했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선전전에 나오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다.
그를 선전전에 적극 활용해 온 러시아로선 머쓱해질 수밖에 없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한 러시아 대표는 이바노바의 '영웅적 행위'를 칭송하는 연설을 했고, 러시아 의회에선 우크라이나 신나치들로부터 이바노바를 구출하기 위한 특별 작전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세르게이 키리옌코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 제1부실장은 "그는 나치와 파시즘에 대항한 투쟁의 상징이다. 그는 돈바스와 러시아 인민 모두의 할머니가 됐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바노바는 "전쟁이 이어지면서 매일같이 포탄이 우리 위를 날아다닌다. 포격이 있을 때마다 깨친 창문을 고치는 것도 의미가 없다"면서 "이제 정원에 씨앗을 심고 있지만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삶이 한 가닥 실에 매달려 있는 듯하다"고 털어놨다.
hwangch@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