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 로마나] 이탈리아 참전용사 후손이 바라본 한국전쟁

입력 2022-06-22 07:07   수정 2022-07-02 23:01

[비아 로마나] 이탈리아 참전용사 후손이 바라본 한국전쟁
변호사 살바토레 폴리니씨, 이탈리아 의료부대 조명 책 출간
"한국, 전쟁 폐허서 세계 일류국가로 우뚝…통일이 곧 종전"

[※ 편집자 주 : '비아 로마나'(Via Romana)는 이탈리아어로 '로마의 길'이라는 뜻으로, 이탈리아 현지의 숨겨진 인물이나 이야기를 찾아 전하는 특파원 연재 코너입니다.]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 부산항에 이탈리아 의료부대 장교·간호사·사병 등 60여 명이 의약품·기자재와 함께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미국 군함 제너럴랭핏호를 타고 나폴리항을 떠난 지 꼭 한 달 만에 한국 땅에 발을 내디뎠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이탈리아는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음에도 국제사회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고 의료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이탈리아 의료부대는 같은 해 12월 서울 영등포 신길동, 현재의 우신초등학교 부지에 '제68 적십자병원'을 개원하고서 활동을 시작했다.
150여 개 병상에 내과·외과·소아과·치과 등을 갖춘 병원은 전선에서 다친 병사는 물론 민간인 치료에도 큰 힘을 보탰다.
특히 1952년 9월 170여 명의 사상자가 난 구로동 경인선 열차 충돌사고 때는 기민한 응급 대응으로 다수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의료부대의 헌신적인 활동을 높이 평가한 이승만 대통령이 사고 한 달 뒤 직접 제68 적십자병원을 찾아 부대 표창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들은 정전 후 유엔군 병사들이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민간인 진료·구호를 위해 한국에 남아 1년 넘게 활동을 이어갔다.
1955년 1월 철수할 때까지 치료한 환자 수는 입원환자 7천여 명, 외래환자 22만2천여 명에 달한다. 본국으로 돌아가면서는 의료장비와 시설을 한국 정부에 기증했다.
우신초 교정에는 지금도 이탈리아 의료부대의 인류애를 기리는 참전 기념비가 남아있다.
이미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탈리아 의료부대를 기억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이탈리아 역시 한국전 용사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다. 이탈리아에는 현재 단 한 명의 참전 용사만 생존해 있다.



이런 가운데 참전 용사의 후손이 한국전쟁과 이탈리아 의료부대의 활동상을 조명한 책을 출간해 눈길을 끈다.
'이탈리아의 한국전 참전'(La Partecipazione Italiana alla Guerra di Corea)이라는 제목을 단 이 책의 저자는 제68 적십자병원에서 외과 과장으로 임무를 수행한 피에트로 폴로니씨의 아들 살바토레 폴로니씨다.
책에는 한국전쟁의 발발 배경과 개전 후 전개 과정, 이탈리아 의료부대의 파병과 치료 활동 등이 130여 쪽에 걸쳐 상세히 소개돼 있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전 참전 부대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드문 저작물이다.
밀라노에서 활동하는 변호사인 폴로니씨는 21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부친을 포함해 참전한 이들의 소중하고 특별한 헌신을 기리고 싶었다고 책을 쓴 배경을 전했다.
책에는 부친이 생전 간직해오던 메모와 사진 자료가 빼곡히 담겨있다.
외과 의사이자 병원장이던 부친은 2차 대전 후 되찾은 안락한 삶을 잠시 접어두고 3년간 지구 반대편에서 전쟁의 참화에 휘말린 이들을 돕기로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2차 대전의 참상을 겪으며 폭격과 극한의 조건을 경험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처참한 상황에 놓인 한국인들의 고통에 충격을 받았고, 어린이·여성·노약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쉬지 않고 노력하셨죠"
부친의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인지 폴로니씨는 어릴 때부터 종종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다고 했다. 그중에는 환자들에 대한 추억도 남아있다.
한번은 부친이 심각한 화상을 입은 어린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어린이는 화상으로 팔·다리·목이 모두 붙어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는데 여러 차례 수술 끝에 가까스로 정상에 가까운 활동이 가능하게 됐다.
오랫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던 이 아이는 어느 순간 부친과 각별한 사이가 돼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이는 부친이 받은 여러 훈장보다도 자랑스러운 것이었다고 폴로니씨는 돌아봤다.



폴로니씨는 수년 전 한국 정부가 주최한 해외 참전용사·유가족 초청 행사를 계기로 모친과 함께 한국을 처음 방문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특히 전쟁 당시 부친이 일한 제68 적십자병원 부지(현 영등포 우신초)를 찾은 감회는 특별했다. 그는 이를 두고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었다"고 회고했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한국의 발전상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폴로니씨는 "현대적이고 효율적이며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데다 아름다운 풍경까지 지닌 나라를 발견했다"면서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됐다가 완벽히 다시 일어서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적인 기적까지 이뤄 세계 일류 국가가 됐다"고 찬사를 보냈다.
지금도 언론 등을 통해 한국 관련 소식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그는 남북한 통일이 진정한 한국전쟁의 종식을 가져올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한국은 하나의 국가이고, 38선을 따라 그어진 국경선은 인위적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70년 전 발발한 전쟁을 끝낼 유일한 방안은 하나의 자유민주 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luc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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