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세계보건기구(WHO)가 규정한 게임이용장애(이른바 '게임 중독') 질병코드의 국내 도입 여부를 놓고 논의가 재점화될 조짐을 보인다.
게임 업계를 중심으로 질병코드 도입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거센 가운데, 업계 자체적인 인식 개선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WHO 질병코드 등재 과정서 참고한 연구, 과학적 근거 불충분"
9일 업계에 따르면 '게임이용 장애 질병코드 국내도입 문제 관련 민·관 협의체'(이하 민관협의체)가 지난 2020년 연구용역을 맡긴 연구과제 3건이 모두 완료됐다.
보건복지부가 의뢰한 두 건의 과제는 이미 지난해 연구가 끝나 이미 보고서가 제출됐고,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의뢰한 과제는 지난달 연구가 끝났다.
민관협의체는 연구용역이 끝남에 따라 국무조정실 조율 하에 후속 절차를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연구보고서에는 게임이용장애를 정신질환으로 규정하기에는 데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내용이 상당히 많이 포함돼 있다.
안우영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가 연구 책임을 맡아 지난해 8월 보건복지부에 제출한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재 과학적 근거 분석 연구' 결과보고서는 WHO의 게임이용장애 국제표준질병분류(ICD) 11판 등재에 대해 "등재 과정에서 참고한 연구들이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요약했다.
또 그간의 게임이용장애 유병률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역학적 증거의 신뢰도가 낮은 상태이며, 엄격한 방법론에 근거해 표본 집단을 활용한 유병률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중앙대 산학협력단이 보건복지부 의뢰로 수행한 '게임이용장애 실태조사 기획 연구'는 그간의 게임이용장애 실태조사 상황을 분석하고, 실태조사를 위해 새롭게 개발한 선별도구 및 진단면접 도구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다만 보고서에는 성별·연령대별 1천5명을 대상으로 한 예비조사 결과만 포함됐고, 본격적인 실태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WHO 질병코드 등재의 과학적·통계적 근거가 부실한데도 이를 국내에 도입할 경우 악영향은 매우 클 것으로 전망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전주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도입에 따른 파급효과 연구'는 질병코드 도입시 2년간 게임산업이 8조8천억원의 막대한 피해를 볼 것이라고 추산했다. 이같은 피해는 게임산업 전체 규모 약 20조 원의 44%에 해당한다.
연구진은 게임산업 매출액이 44% 감소될 경우 총생산이 12조3천600억원가량 줄어들고 8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질병코드 도입 반대 여론과의 충돌 등으로 인해 1조6천억여원의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 ESG 화두 된 게임업계, 확률형 아이템 개선 노력 보여줘야
다만 질병코드 등재 여부를 논의할 시간은 3년가량 남았다.
게임이용장애가 국내에서도 질병으로 관리되기 위해서는 통계청이 관리하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체계(KCD)에 등재돼야 한다. KCD는 5년마다 한 번 개정되는데, 돌아오는 다음 개정 시점은 2025년이다.
이 문제에 대한 여론은 아직 찬·반 중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지는 않은 상태지만, '찬성'이 '반대'보다 조금 우세하다.
2019년 5월 WHO의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재 직후 리얼미터가 시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질병 지정에 대해 '찬성한다'는 응답은 45.1%, '반대한다'는 응답은 36.1%였다.
같은해 바른미래당 싱크탱크 바른미래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게임이용장애의 질병 분류에 53.6%가 찬성, 40.6%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질병코드 분류에 반대하는 게임 업계로서는 이런 사회 전반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이 과제 중 하나인 셈이다.
게임 업계는 지난해부터 산업계의 화두가 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개선) 전담 조직을 설립하고,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ESG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지난해 '트럭 시위' 사태를 불러일으킨 확률형 아이템 판매 문제에 대한 개선 의지는 ESG 보고서에 드러나 있지 않다.
이전부터 해오던 조직문화 개선, 보안 강화, 에너지 효율 개선, 단발성 사회공헌 사업을 ESG로 홍보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전문가들은 게임 업계가 먼저 나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지적을 내놓는다.
한국게임학회장을 맡은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게임중독 질병코드 분류를 추진하는 측에서 향후 게임의 사행성을 걸고넘어질 경우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업계가 먼저 나서서 확률형 아이템 위주의 BM(비즈니스 모델)을 과감하게 개선하는 자정 능력을 보여줘야 질병코드 도입 반대 의견에도 힘이 실릴 것"이라고 전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정보통신위원장을 맡은 방효창 두원공대 스마트IT학과 교수는 "소수의 '헤비 유저'에 의존하는 수익 구조에서 벗어나 '좋은 게임'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 주어야 지속 가능한 게임 산업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juju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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