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책임 회피 위해…러 기업 감사했다간 '제재위반' 불이익
(서울=연합뉴스) 전명훈 기자 = 글로벌 회계법인들이 감사 의뢰 기업에 러시아와의 관련성을 꼬치꼬치 캐묻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러시아인이 주요 주주이거나 러시아의 투자를 받은 기업을 감사했다간 대(對)러시아 제재 위반으로 당국의 철퇴를 맞을 수 있어서다.
미국 상위 10위권 회계법인 BDO USA는 최근 감사 대상 기업과 계약을 맺으면서 '러시아와 중대한 관련성이 없다'는 점을 계약서에 명시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27일(현지시간) 해당 계약서를 입수해 보도했다.
러시아인 또는 러시아에 체류 중인 개인·법인이 감사 대상 법인의 지분 5% 이상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도록 요구하는 조항이 계약서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 기간에 이런 기준에 해당하는 지분 변동이 있는 경우 회계법인에 즉각 통보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국·유럽 등 서방 국가가 부과한 대러시아 경제 제재에 따라 서방의 회계법인은 러시아인·러시아 기업을 대상으로 회계 감사를 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주요 회계법인들은 러시아 측 제휴사와의 관계도 완전히 단절했다.
특히 미국은 러시아에 체류 중인 개인·기업에 대한 감사가 금지돼 있다. 미국 정부는 이 제재를 위반하는 회계법인은 수사를 통해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의지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기업 소송 관련 인기 블로그를 운영하는 케빈 라크루아 RT스페셜티 부사장은 WSJ에 "회계법인이 감사 대상 기업에 러시아와 관련성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도록 요구하게 되면 제재 위반 시 법적인 책임이 해당 감사 대상 법인이나 경영진에 돌아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령 한 회사가 주주의 국적을 허위로 기재하고 그 결과 회계법인이 제재 위반으로 과징금을 물게 되는 경우, 회계법인은 감사대상 법인에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딜로이트, 언스트앤드영(EY), KPMG,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등 '빅4'를 포함한 미국의 다른 글로벌 회계법인들도 비슷한 절차를 도입하는 분위기다.
PwC는 "특정 (외부감사) 계약으로 제재를 위반할 여지가 있는지 확인하는 추가 절차를 도입했다"고 밝혔다. PwC는 소속 회계사들이 각 감사 대상 법인에 러시아인 주주가 존재하는지 문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KPMG도 "감사 대상 법인이 대러시아 제재를 포함한 현행법과 규정을 준수하고 있는지 해당 법인에 질의해 관련 정보를 취득하고 있다"고 밝혔다. 딜로이트와 EY는 WSJ의 관련 질의에 답변하지 않았다.
감사 대상 법인들은 이런 절차를 반기지 않는 눈치다.
BDO USA와 계약한 한 감사 대상 법인 경영진은 "이제 투자자한테 '당신 국적이 어디냐'라고 물어봐야 한다는 뜻"이라며 "투자자한테 어디서 태어났는지 물어보고, (만약 러시아인이면) 투자하지 말라고 제한하라는 건가"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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