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반도체 설계·장비기술 보유에도 역내 생산 저조로 대외 의존도 커
EU, '60조원 투입' 반도체법 내년 시행…2030년까지 생산 점유율 9→20% 목표
한국엔 잠재적 위협이자 기회…R&D 협력 강화하되 대비도 필요
(브뤼셀=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 '반도체 기술을 연구실에서 EU 생산시설로'(From the lab, to the fab)
유럽연합(EU) 행정부 수장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2월 8일 반도체 산업 역량 강화를 위한 '유럽 반도체법'(The European Chips Act)을 제안하면서 제시한 목표다.
반도체 설계·제조장비 분야에서 기술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생산기반 부족으로 완제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유럽의 반도체 생태계를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기에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전적으로 의존하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초유의 에너지 위기를 겪은 유럽 입장에서는 '미래의 석유'로 불리는 반도체 자급률을 끌어올리는 게 시급한 과제가 됐다.
◇ 반도체 수요 세계 3위…공급부족에 '주력' 자동차업계 직격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올 상반기 발간한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은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약 20%(2019년 기준)를 소비해 미국, 중국에 이어 단일시장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그 규모가 컸다.
그러나 EU 집행위가 지난 2월 밝힌 EU의 전 세계 반도체 생산점유율은 9%로 역내 소비량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결국 유럽은 한국, 대만 등 아시아와 미국 시장에 완제품 수입을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역내에서 생산되는 반도체도 대부분 기존의 22㎚(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상 제품에 집중돼 있고, 첨단 반도체로 분류되는 7㎚ 이하의 경우 아예 생산되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똑같이 반도체 소비량이 많은 미국, 중국과 비교하더라도 유럽의 대외 의존도가 더 심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촉발된 전 세계적 반도체 부족 사태로 이런 위기감은 현실이 됐다.
유럽 주력 산업인 자동차 업계가 직격탄을 맞은 게 단적인 사례다.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에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작년 EU 내 신규 차량 판매량은 970만대로, 1990년 이후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 반도체 R&D 투자 집중…첨단 제조장비 기술력 '최강'
그러나 생산역량만으로 유럽의 반도체 역량을 평가절하해선 안 된다. 높은 역외 의존도는 연구개발·설계 및 제조 장비 기술에 집중된 반도체 생태계 특성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복잡한 공정의 첨단 반도체 생산을 위해선 고도의 기술력이 접목된 제조장비가 필수인데, 이 분야에서만큼은 유럽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특히 네덜란드 반도체장비업체 ASML의 경우 5㎚ 이하 첨단 반도체의 초미세공정 중 핵심 장치인 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고 있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가 개발한 또 다른 첨단 공정인 FD-SOI(완전 공핍형 실리콘 온 인슐레이터) 기술은 한국의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업체 생산공정에 활용되고 있다. 이 외에 EU에서 탈퇴한 영국에는 세계 최대 반도체 설계 기업인 ARM 본사가 있다.
첨단 기술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기관이 포진해 있는 것도 특징이다.
벨기에에 위치한 비영리 조직인 아이멕(IMEC·Interuniversity MicroElectronics Centre)이 대표적이다. 유럽, 아시아, 북미 전역 7개국에 연구소를 두고 있으며 약 100개국에서 수천 명 연구진이 몰려든다. 반도체 기술 연구의 허브인 셈이다.
1967년 프랑스 대체 에너지 및 원자력 위원회(CEA)의 비영리 연구부서로 설립된 프랑스 전자정보기술연구소(CEA-Leti) 역시 반도체와 나노기술 응용 연구를 위한 세계 최대 연구기관 중 하나다.
◇ 2030년 생산점유율 9→20% 목표…인텔, 10년간 110조 원 투자 계획
EU 27개 회원국 담당장관들은 1일(현지시간) 공공·민간 투자를 통해 반도체 생산 확대에 430억 유로(약 59조원)를 투입하는 반도체법에 합의했다.
EU 집행위가 올해 2월 내놓은 이 법안은 연구개발과 제조장비 기술 강점을 바탕으로 생산 역량을 단기간에 확대, 2030년까지 EU의 전세계 반도체 생산 시장 점유율을 기존 9%에서 20%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내년 초 유럽의회 토론 및 표결을 거치면 시행될 전망이다.
EU 집행위는 당시 해당 법안을 규정(Regualtion) 형태로 제안했는데, 이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입법안이기도 하다.
미국과 중국을 주축으로 주요 반도체 생산국이 생산 역량 강화에 열을 올리고 있어 속도를 내지 않으면 패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공정경쟁 보장 차원에서 보조금 지급 요건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EU가 반도체법 입법 추진과 함께 보조금 규제 완화를 시사하면서 유럽 시장에 관심을 보이는 업체도 속속 늘어나고 있다.
미국 인텔의 경우 향후 10년간 유럽에 반도체 생산 시설 등을 위해 향후 10년간 800억 유로(약 110조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지난 3월 일찌감치 발표했다.
독일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과 연구시설 등이 접목된 '메가팹(Mega fab)'을 짓는 것을 비롯, 아일랜드에도 생산 시설을 확장할 계획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는 각각 연구·개발(R&D) 센터와 후공정·조립공장을 설립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의 인피니온도 정부 지원을 받아 드레스덴에 반도체 칩의 핵심 기초소재인 300㎜ 웨이퍼를 생산하는 공장을 세울 예정이다.
◇ 한국엔 잠재적 위협이자 기회…R&D 협력 강화하되 대비도 필요
EU가 반도체 생산설비 확충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면 장비 수요도 급증, 한국 반도체 장비업체의 유럽 진출이 확대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실제로 올 상반기 기준 유럽의 반도체 장비 구매액은 이미 전년 대비 146% 급증했다.
유럽의 우수한 반도체 응용 연구 기술과 한국의 생산기술의 협력 확대 가능성도 제기된다.
코트라는 상반기 관련 보고서에서 "우리 기업이 경쟁력을 보유한 후공정 장비 분야에서 진출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반도체 성장기반 강화를 위해 한-EU 공동 R&D 등을 통한 다각적 협력 도모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다만 EU 반도체법 초안에 공급망 위험 요소가 감지되면 긴급 조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데 대해 주의도 요구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5일 "쉽게 말하자면 비상사태 발생 시 EU에서 생산되는 반도체가 역외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라며 "만약 우리 업체가 EU 내 기업으로부터 반도체 칩을 공급받는 경우 EU가 보호무역 성격이 있는 조항을 발동하게 되면,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유럽까지 반도체 생산 경쟁에 가세하면서 원자재 수요 급증 등으로 인한 수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어 중장기적으로는 대비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shi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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