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전 이후 급증…'배럴당 60달러' 제재 기준 피하려 꼼수
'암흑 선박' 보험사는 대부분 서방 기업…적발 시 보험 끊겨
(서울=연합뉴스) 송진원 기자 = 지난 2월 유조선 캐세이 피닉스호는 선박자동식별시스템(AIS)을 통해 일본 서쪽으로 항해 중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배의 이동 경로가 특이했다. 위치만 급격히 바꿔가며 일정 구역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위성 사진은 의문을 더 키웠다. AIS에 찍힌 그곳엔 아예 배가 없었다.
캐세이 피닉스호가 위장술로 가짜 위치 신호를 보낸 것이다.
캐세이 피닉스호는 그 시간 북쪽으로 250마일(약 402㎞) 떨어진 러시아 극동지역 코즈미노항에서 원유를 선적하고 있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캐세이 피닉스호 같은 '암흑 선박'의 활동이 급증했다고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 등 서방이 러시아산 원유 가격을 배럴당 60달러 이하로 제한하는 등 제재를 가하자 이를 피해 중국 등에 몰래 석유를 운반하는 것이다.
암흑 선박들은 그간 국제 제재를 받은 베네수엘라나 이란산 석유를 운반하는 데 주로 관여해 왔다. 선박의 위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통상 AIS를 끄는 수법을 이용했다.
NYT는 그러나 캐세이 피닉스호 등 자체 추적한 3척의 '암흑 유조선'은 이를 뛰어넘어 가짜 위치를 전송하는 최첨단 위장술을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상업적으로 이용 가능한 군용장비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AIS에서 송출되는 선박 위치를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의 전 제재 준수 담당자인 데이비드 타넨바움은 NYT가 확인한 선박들의 위장술이 "흔치 않고 정교하다"며 "모든 면에서 확실히 제재 회피술로 보인다"고 말했다.
NYT는 이들 선박이 서방 제재로 묶여 있는 가격 상한선을 넘겨 러시아산 원유를 중국에 판매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선적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세관 및 수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동부 시베리아-태평양 파이프라인을 통한 러시아산 원유의 평균 가격은 배럴당 약 73달러로 상한선을 훨씬 상회했다고 NYT는 보도했다.
NYT는 중국이나 러시아 모두 서방 제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양국을 오가는 유조선이 위장술을 써 석유를 운반하는 것 자체로는 제재 위반이 아니라고 짚었다.
그런데도 이들 유조선들이 위장술을 쓰는 것은 이들이 가입한 보장성 보험사가 대부분 서방 기업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방 보험사의 보험에 든 유조선이 가격 한도를 초과해 판매되는 러시아산 석유를 운반한다면 보험사로서는 제재를 위반하게 되는 셈이므로 보장을 중단해야 한다.
보장성 보험이 있어야만 주요 항구에서 운항할 수 있는 만큼, 유조선들로선 보험이 끊기는 걸 막기 위해 위장술을 써야 하는 상황이다.
NYT가 추적한 유조선 3척도 모두 미국에 본사를 둔 보험사 '아메리칸 클럽'에 가입돼 있었다.
NYT로부터 해당 선박들의 위장 항해 정보를 전달받은 아메리칸 클럽의 대니얼 타드로스 최고운영책임자는 잠재적 조사 가능성에 대해선 언급할 수 없다면서도 "제재 위반 시 보험 적용 대상에서 자동으로 제외된다"고 말했다.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그간 미국 기업들에 선박들의 기만행위의 증거가 있는지 AIS 신호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반복해서 주의를 줬다. 제재 회피 고위험 지역에 있는 선박의 이력도 조사하라고 권고했다.
특히 올해 4월에는 코즈미노항 주변에서 벌어지는 위장술을 지목해 더 엄중히 경고하면서 의심스러운 활동을 탐지하기 위해 '해양 정보 서비스'를 이용하라고 권고했다.
s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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