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시선] 안보문제에서 기업이익 보호로 변질된 미국의 수출통제

입력 2023-09-24 07:07  

[특파원시선] 안보문제에서 기업이익 보호로 변질된 미국의 수출통제
美정부, 한수원의 체코 원전 수출신고 반려해 웨스팅하우스 이익지키기
수출통제권 쥔 美정부 입장 중요…한미 정부간 협의에도 분쟁 해결 요원



(워싱턴=연합뉴스) 김동현 특파원 = 중국과 경쟁하는 미국의 국력이 과거 같지 않다고 하지만 첨단기술에서는 미국의 우위가 여전하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과거에 개발한 원천기술과 지식재산권으로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 핵심기술의 주요 길목을 통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타국이 군사력 강화에 사용될 수 있는 기술과 장비를 획득하지 못하게 하는 수출통제 제도는 미국의 가장 효과적인 대(對)중국 견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은 자국 기업의 수출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이며 외국 기업의 수출에서도 해당 제품에 미국 기술이나 부품을 이용했다는 이유로 개입하고 있다.
'경제 안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하지만 때로는 경쟁자가 따라붙지 못하도록 소위 '사다리를 걷어차는' 용도로 남용되기도 한다.
미국 원전기업 웨스팅하우스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원전 수출을 막으려고 작년 10월 미국 법원에 낸 소송이 한 사례다.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폴란드와 체코 등에 수출하려는 한국형 원전 APR1400이 과거 한수원에 사용을 허가한 웨스팅하우스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됐으니 수출하려면 자사 허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웨스팅하우스는 오래전부터 한국형 원전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주장해왔는데 주목할 점은 웨스팅하우스가 한수원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수출통제 규정을 꺼냈다는 것이다.
미국 원자력에너지법은 미국 원전 기술을 수출할 때 에너지부 허가를 받거나 신고하도록 하는데 웨스팅하우스는 법원에서 한국형 원전도 이런 수출규제 적용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납득하려면 한국형 원전이 웨스팅하우스 기술이라는 점을 먼저 입증해야 하지만,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과 지식재산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대신 미국 정부의 힘을 빌려 압박하려는 모습이다.



미국 정부도 웨스팅하우스의 이런 의도에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추는 것으로 보인다.
한수원은 한국형 원전이 수출통제를 적용받는 미국 기술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한미관계를 고려해 작년 말 미국 에너지부에 체코 원전 수출 정보를 제출했다.
에너지부가 이를 수리했다면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를 신경 쓰지 않고 독자적으로 체코 원전 수출을 추진할 수 있었겠지만, 에너지부는 한수원의 신고를 반려하고 웨스팅하우스와 협력하라고 주문했다.
웨스팅하우스와 같이 신고해야 받아주겠다는 것인데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지식재산권 문제에서 양보하지 않는 한 협력할 리가 없다.
미국 원자력 수출통제의 목적은 핵무기 개발 등에 사용될 수 있는 원자력 기술이 위험한 국가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인 폴란드와 체코 모두 규정상 정부 허가 없이 수출 정보를 신고만 하면 되는 국가이며 웨스팅하우스도 이 두 국가에 원전 수출을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늘 역내 평화와 안보의 '핵심축'이라고 평가해온 한국의 공기업을 특별히 의심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정황상 에너지부가 한수원의 신고를 반려한 게 안보 우려나 수출통제 집행이 아니라 자국 기업 이익 때문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런 가운데 미국 법원이 지난 18일(현지시간) 수출통제 집행권은 웨스팅하우스가 아닌 미국 정부에 있다는 이유로 소송을 각하하면서 앞으로 미국 정부의 입장이 더욱 중요해졌다.
한미 양국은 지난 4월 정상회담 등 계기에 여러 차례 원전 산업 협력을 약속했고, 이 문제도 협의하고 있지만 아직 양사 간 분쟁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국제관계에서는 아무리 동맹이라고 해도 선의를 기대하기 어렵지만 미국이 수출통제의 본 목적에 충실하고 자국 기업 이익을 앞세우지 않기를 바란다.
blueke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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