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美 영향에 이스라엘과 수교…국민 여론 부정적
전쟁 이후 단교 요구 시위 잇따라…반정부로 번질 조짐도
(서울=연합뉴스) 박진형 기자 =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으로 막대한 사망자가 발생한 데 대해 아랍권 각국에서 분노의 여론이 끓어오르면서 이들 국가 정권과 국민 사이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아랍권 국민들은 이스라엘과 단절을 요구하는 반면, 통치자들은 미국을 의식해 이스라엘과 관계를 유지하자 분노한 국민 여론이 반정부로 흐를 조짐마저 보인다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6일(현지시간) 진단했다.
인구 160만여명의 걸프만의 작은 섬나라 바레인은 이런 긴장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바레인의 친미 독재 왕정은 2020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재한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아랍에미리트(UAE)·모로코와 나란히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 수립에 합의했다.
이후 자국에 이스라엘 대사관을 설치하고 지난 9월에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와 포괄적 안보협정에 서명했다.
지난 수십 년간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은 바레인 등 아랍 각국의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은 최근 수년간 미국과의 관계에서 얻는 경제적·안보적 혜택을 저울질하며 입장을 바꿨다고 NYT는 설명했다.
이번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바레인 왕정은 이런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달 17∼19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연례 안보 콘퍼런스 '마나마 대화'에서도 살만 빈 하마드 알 할리파 바레인 왕세자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를 비난, 서방 각국 참석자들을 만족시켰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에 대해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애통해하면서도 이스라엘과 단교 카드 등을 꺼내 이스라엘을 압박하지는 않았다.
바레인 관리들도 행사 참석자들에게 바레인 정부가 아브라함 협정을 지키는 데 단호한 입장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바레인 일반 국민들의 기류는 완전히 딴 판이다.
이미 아브라함 협정 이후 비판 여론이 널리 퍼져 전쟁 이전의 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76%가 아브라함 협정의 영향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답변했다.
바레인 정부는 아브라함 협정에 따른 '관용과 공존'을 강조하고 있지만, 왕정이 국내 비판 세력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면서 이런 주장은 많은 국민에 공허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전쟁 발발 이후 바레인 국민의 팔레스타인 지지 여론은 이스라엘 비난을 넘어서서 하마스를 지지하고 바레인 정부를 비판하는 데까지 나가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바레인 국민이 수니파와 시아파, 청년층과 노년층, 세속적 좌파와 보수적 이슬람주의자 등 종파·세대·정파 간 차이를 넘어서 팔레스타인 지지·이스라엘 반대로 뭉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나마 대화' 행사 기간 마나마에서는 팔레스타인 지지·이스라엘 규탄 시위가 잇따라 열렸다.
한 시위에서는 시위대 수천 명이 "이스라엘 타도", "미국은 뱀의 머리다" 같은 구호를 외쳤으며, 일각에서는 하마스 지지 구호도 나왔다.
또 다른 시위에서는 200여 명이 "시온주의자 대사관이 바레인 땅에 있어서는 안 된다", "미군기지가 바레인 땅에 있어서는 안 된다"며 이스라엘 대사 추방을 촉구했다.
이들 시위대가 '팔레스타인 해방'에서 더 나가 바레인의 왕정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번질 조짐도 보이고 있다.
마나마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에 참여한 22세 여성 파티마 주무아는 "우리의 존재·자유는 팔레스타인의 존재·자유와 연결돼 있다"며 "우리가 자유로운 국민이 되기를 열망한다"고 NYT에 밝혔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엘함 파크로는 "바레인 정부는 미국에서 온건파로 보이기를 바라며, 워싱턴DC에서 이런 인식을 형성하기 위해 자국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관계를 점차 더 활용하고 있다"며 "하지만 이는 자국에서는 다른 영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jh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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