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총리, 취임 후 자민당 새 모습 못 보여줘…과거 언급 뒤집는 행보도
(도쿄=연합뉴스) 경수현 특파원 = 일본 집권 자민당이 27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총선)에서 여당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것은 옛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준 2009년 이후 15년 만에 맛본 최악의 선거 결과다.
자민당은 1955년 결성되고서 비(非) 자민·비 공산 연립정권이 들어선 1993년 9월∼1994년 6월과 옛 민주당이 집권한 2009년 9월∼2012년 3월 등 2차례 약 3년 3개월을 빼고는 일본 국정 운영을 독점해왔다.
2012년 정권을 탈환하고서는 2014년, 2017년, 2021년 등 그동안 4차례 총선에서 매번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공명당과 함께 안정적인 정치 기반을 다져왔다.
정권 탈환에 성공한 아베 신조를 시작으로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이시바 시게루로 이어진 총리 자리는 당연히 의회 다수 석을 지닌 자민당 총재에게 자동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은 여당의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연정 확대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 '비자금 스캔들' 심판 여론 커…이시바 총리, 말 뒤집기 등 '실망 행보'
자민당이 이번 선거에서 15년 만의 최악 성적표를 받아 든 이유로는 무엇보다 '비자금 스캔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 여론이 꼽힌다.
앞서 자민당 일부 파벌은 정치자금 모금 행사(파티)를 주최하면서 '파티권'을 할당량 이상 판 소속 의원들에게 초과분 돈을 다시 넘겨주는 방식 등으로 오랫동안 비자금을 조성해 왔다.
당은 이런 사실이 검찰 수사 등으로 공개되자 39명을 징계했고, 중징계를 받거나 비자금 의혹을 명확히 해명하지 않은 12명을 공천 대상에서 배제했다.
하지만 과거 록히드 사건, 리크루트 사건 등 대형 부패 사건으로 파벌과 금권 정치 이미지가 강한 자민당에서 터진 이번 스캔들은 유권자들에게 다시 큰 실망감을 안겼다.
이런 가운데 기시다 전 총리는 내각 지지율이 국정 운영이 어려울 지경까지 추락하자 결국 연임 도전을 포기했고 그 결과 탄생한 정부가 이시바 내각이다.
하지만 지난달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겨 새 내각을 출범한 이시바 총리는 이달 1일 취임 이후 특별히 새로운 자민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총재 선거 때는 야당과의 여러 문제에 대해 논의를 충분히 벌여나갈 것처럼 말했지만 취임 후 8일 만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치렀다.
일반적으로 새로 출범한 내각은 지지율이 높다는 '허니문 효과'를 노려 조기 총선을 통해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지려 한 선택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원래 그는 자민당 내 비주류로 아베 전 총리 등을 상대로 쓴소리를 내뱉으며 개혁적인 이미지를 쌓아왔지만, 총리 취임 후에는 자신이 과거 했던 말들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이시바 총리는 총재 선거 때 경쟁자인 고이즈미 신지로 의원이 최대한 조기에 의회를 해산해 총선을 실시할 것이라는 공약을 제시하자 충분한 국회 논의 과정을 거치는 게 바람직하다며 자신은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야권에서는 권력을 잡기 전과 잡은 뒤 이시바 총리의 말과 행보가 달라진 데 대해 '거짓말쟁이', '변절자' 등 비판이 쏟아졌다.
선거 과정에서 야당은 자민당을 상대로 '비자금 스캔들'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선거 막판에는 비자금 문제로 공천을 주지 않은 출마자가 대표를 맡은 당 지부에도 '활동비' 명목으로 2천만엔(약 1억8천만원)을 지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거짓 공천 배제' 의혹도 제기됐다.
◇ '잃어버린 30년'에 이은 고물가도 부담…실질 임금 장기간 후진
'비자금 스캔들'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면 장기간 경제 부진과 팍팍한 민생은 자민당에 대한 지지 기반이 약화하는 토양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 유권자들은 정치 문제보다는 자신의 생활과 한층 더 밀접한 경제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교도통신이 지난 1∼2일 벌인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새 내각의 우선과제(복수응답)로 55.9%가 '경기·고용·물가 대책'을 꼽았고 '연금·사회보장'(29.4%), '육아·저출산'(22.7%) 등 순이었다.
하지만 이시바 총리는 경제 대책에서 특별히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과거 자신이 부정적으로 비판한 아베 전 총리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에 대해서도 옛 아베파 등 당내 반발을 의식한 듯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심지어 그는 과감한 돈 풀기가 특징인 아베노믹스에서 방향 전환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시장에서 퍼지며 자기 취임 후 증시가 급락하자 일본은행 총재와 만나고서 "추가 금리 인상을 할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시다 전 총리도 취임 초 '새로운 자본주의'를 구호로 내세우며 아베노믹스로 확대된 빈부격차를 축소하려 부유층 금융소득 과세를 논의하기도 했으나 증시가 부정적으로 반응하자 내각 출범 초 궤도 수정을 한 바 있다.
아베노믹스는 아베 전 총리가 '잃어버린 30년'으로 상징되는 저성장 경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내세운 정책 방향이다. 하지만 국민 소득은 늘지 않고 빈부 격차만 확대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최근에는 엔화 약세로 수입 상품 가격 상승에 따른 고물가 부담이 민생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물가 상승에 따라 실질 임금은 장기간 후진해왔다.
일본 후생노동성 집계에 따르면 일본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2022년 4월 이후 올해 5월까지 26개월 연속 감소하다가 6월과 7월에 여름 보너스 증액 등에 힘입어 일시 증가했으나 8월에는 다시 감소세로 전환했다.
ev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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