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이어온 알코올 소비 감소 추세 뒤집혀…"전쟁 인한 불안 작용"
(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 보드카로 유명한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술 고래' 이미지가 강한 사회였다.
러시아 제국을 탄생시킨 표트르 대제는 1.5ℓ짜리 맞춤형 잔으로 술을 마셨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애주가였고,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재임 중 미국 방문 때 과음으로 비틀거리는 모습이 노출되는 등 음주벽으로 악명 높았다.
하지만 전임 지도자들에 비해 절주하는 성향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치하에서 러시아는 각종 세금과 마케팅 통제 등을 앞세워 지난 10년 간 술 소비량을 크게 줄여왔다. 2003년 20ℓ로 정점에 달했던 1인당 순수 알코올 구매량은 2017년에는 7ℓ로 3분의 1 토막이 날 정도였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러시아의 이 같은 술 소비량 감소 흐름이 최근 뒤집히고 있다면서, 3년을 향해 가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인한 심리적인 충격이 과음의 부활에 영향을 미쳤다고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더타임스에 따르면 올 들어 1∼10월 러시아의 알코올 판매는 18억4천만ℓ에 달해 관련 집계가 시작된 2017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주종별로는 러시아의 '국민 술'인 보드카가 이 기간 6억2천만ℓ가 팔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가운데, 와인이 2017년에 비해 22.5% 증가한 4억7천만ℓ로 뒤를 이었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술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현재 러시아의 1인당 순알코올 소비량은 2017년에 비해 1ℓ 늘어 8ℓ 수준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와 함께 알코올 의존증 진단 사례도 10년 만에 처음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15만3천900 명에 달했던 알코올 중독 최초 진단자는 2021년 5만3천 건으로 감소했으나 2022년에는 이 수치가 5만4천200 명으로 소폭 늘었다.
2022년은 러시아가 소위 '특별군사작전'이라는 명칭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 해이다. 2022년 2월 시작된 전쟁은 2년 8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멈출 기미를 보이기는 커녕 북한의 참전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장거리 미사일 사용 금지 해제 조치 등으로 더 격화할 조짐이다.
러시아 보건부는 10여년 동안 이어지던 러시아의 알코올 소비 감소 추세가 뒤집힌 이유로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인 대유행) 기간 사람들이 집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꼽았지만, 우크라이나와의 전쟁과 이와 맞물려 러시아 사회에 더 짙어진 전체주의적 분위기도 간과할 수 없다고 더타임스는 지적했다.
모스크바에 있는 중독 치료기관 책임자인 루슬란 이사예프는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에 "사회적·경제적인 격변과 지정학적인 분쟁과 제재 등으로 과도한 알코올 소비를 줄이는 데 있어서의 성과가 다소 주춤해졌다"고 말했다.
더타임스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과의 반목이 커지면서 확전 가능성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전쟁통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수 있다는 걱정과 징집에 대한 불안감, 반전 의견 표명 시 옥살이를 할 수 있다는 압박감 등이 러시아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고 짚었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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