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전 아프리카 병사 학살 사건에 대해 프랑스 정부에 진상 공개 요구
(서울=연합뉴스) 고일환 기자 = '티아로예의 대학살'은 세네갈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남긴 비극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4년 12월1일. 식민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수도 다카르 외곽에 위치한 티아로예 요새에 수백명의 아프리카 군인들이 모였다.
이들은 전쟁 기간 프랑스 군인들과 함께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장병들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각자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티아로예 요새였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린 것은 당초 프랑스 군이 약속한 밀린 임금과 퇴직금이 아니라 기관총 사격이었다.
15초간 500발 이상의 기관총탄이 발사됐다. 당시 현장을 지휘한 프랑스 장교는 '무장 폭도의 위협 탓에 불가피하게 최소한의 방어 수단을 동원했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올렸다.
프랑스 군의 공식 사망자 수는 35명이지만, 역사학자들은 400명에 가까운 아프리카 군인이 학살당했다고 보고 있다.
프랑스 군이 전쟁터에서 자신들을 도왔던 아프리카 군인들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한 원인도 정확하게 확인이 힘든 상태다.
학살 전 프랑스 장교들이 '군기 확립'의 필요성과 함께 "반란을 획책하는 자들이 포기할 정도로 우월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식민지에 본보기를 삼기 위해 학살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은 세네갈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이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 영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고(故) 우스만 셈벤 감독이 1988년 영화로도 제작했다.
티아로예의 학살을 주제로 한 연극이나 시, 대중음악도 꾸준하게 발표될 정도다.
세네갈은 1960년 프랑스에서 독립했지만, 정부 차원에서 티아로예의 학살을 거론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독립 이후에도 경제와 문화, 정치 등 각 분야에서 프랑스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눈치를 봐야 했던 세네갈 역대 지도자들은 티아로예의 학살에 대한 언급 자체를 피했다.
그러나 사건 80주기를 맞은 올해 이 같은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난 3월 대선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구호로 들고나온 야당 후보 디오마예 파예 대통령이 당선되면서부터다.
세네갈 사상 최연소인 44세의 나이로 취임한 파예 대통령은 티아로예 대학살의 진상을 규명할 위원회를 출범하고, 프랑스 정부를 향해서도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세네갈 정부의 강력한 요구에 프랑스 정부도 기존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최근 파예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80년 전 사건을 '학살'이라고 언급했다.
프랑스 정부가 '학살'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최초였다.
다만 세네갈 정부는 완전한 진실이 규명될 때까지 프랑스 정부에 대한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방침이다.
파예 대통령은 최근 인터뷰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서한 내용이 불충분하다면서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어디에 묻혀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ko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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