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현장 레바논] 꼬이고 얽힌 비극…"가족과 평범한 삶 원할뿐"

입력 2024-12-0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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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현장 레바논] 꼬이고 얽힌 비극…"가족과 평범한 삶 원할뿐"
시리아 출신 루슈디, 내전 격화에 "13년 난민생활 도돌이표" 눈물
'쓰리잡' 뛰며 난민생활, 희망은 요원…고향의 생후 15일 딸 걱정



(베이루트=연합뉴스) 김동호 특파원 = "태어난지 15일 된 딸 얼굴을 아직 못 봤어요. 가족이 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인생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시리아 출신으로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내의 일터인 공방에서 만난 무함마드 루슈디(가명·30)는 1일(현지시간) 최근 반군의 대대적 공세로 시리아 내전에 다시 격화됐다는 소식에 고향의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다시 커졌다.
13년 가까이 이어진 난민 생활을 담담히 털어놓던 루슈디는 "시리아에 있는 가족을 레바논으로 데려오려고 밤낮없이 일하며 살았는데 아직도 제자리인 것만 같다"며 눈물을 보였다.
시리아 내전이 시작되고 1년여가 지난 2012년 11월 어느날, 반군 관계자들이 시리아 제2도시 알레포에 있는 루슈디의 집 문을 두드리더니 "내일 입대하라"며 군복과 AK-47 소총을 건네줬다.
전장에서 총알받이 신세가 될 것을 직감한 18살의 루슈디씨는 어릴적부터 TV 드라마로 접하고 동경해오던 레바논으로 도망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음날 새벽 2시쯤 집을 나서 무작정 국경으로 향했다. 200㎞ 정도 떨어진 레바논 북부 국경까지 차를 얻어타며 가는 동안 정부군과 반군이 제각각 도로에 세워둔 검문소를 약 30곳 지나야 했다.
"군인들한테 현금을 뇌물로 건네며 검문소를 통과했어요. 레바논까지 나흘이 걸렸는데 한 숨도 못 잤습니다."



베이루트에 온 그는 매일 아침 7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페인트공, 전기 수리기사, 슈퍼마켓 직원 등 '쓰리잡'을 뛰며 일했다. 고향에 남은 가족을 빼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우여곡절을 거쳐 4개월 만에 여동생 4명과 어머니를 레바논으로 데려온 루슈디는 이제 고생이 끝난 줄로만 여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전 발발 직후 실종된 아버지를 대신해 고향을 지키던 맏형은 막내동생 루슈디의 행방을 집요하게 캐묻는 반군의 압박에 못이겨 2014년 루슈디 대신 입대했다가 몇개월 뒤 정부군 저격수의 총에 숨졌다.
인접국 튀르키예로 피신했던 둘째 형은 2017년 만삭의 아내를 데리러 다시 시리아에 들어왔다가 경찰에 끌려간 뒤 소식이 없다. 사람들은 이미 형이 정부군에 처형됐을 것이라고 하지만 루슈디는 아직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남편을 잃은 둘째 형수는 갓난아이를 안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려다가 전투가 한창이던 지역에 잘못 발을 들였다. 정부군과 반군 중 누가 쐈는지 알 수 없는 총알에 아이가 맞았고,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아이는 손 쓸 도리 없이 숨지고 말았다.
루슈디의 레바논 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2022년 레바논 북부 트리폴리에 사는 먼 친척 여성과 중매로 결혼한 직후 레바논 이민국의 단속에 걸렸다.
체류 허가가 9년 전 만료됐던 탓에 부인과 함께 시리아로 추방됐는데, 가장을 잃은 친지들을 부양하고 입에 풀칠하기 위해 임신 중인 부인을 두고 다시 레바논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렵게 레바논으로 데려온 어머니와 여동생들도 얼마 전 시리아로 돌아갔다. 반군이 빈집들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소식에 고향 터전을 지키려고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루슈디는 이달 초 태어난 딸의 얼굴을 아직 직접 보지 못했다. 아이의 이름은 아랍어로 왕관이라는 뜻의 '타지(Taj)'로 지었다.
그는 지난 27일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휴전한 직후 반군이 8년만에 알레포를 탈환하는 등 시리아 내전이 다시금 격화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고향을 되찾기도, 위험에 빠진 가족을 데리고 나오기도 불가능해져 오도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무력감을 느낀다며 비관했다.
루슈디는 휴대전화 속 가족사진을 내보였다.
지금 그의 얼굴은 결혼식 날 모습과 딴판이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부인 곁의 루슈디는 환하게 웃고 있지만, 지금은 광대뼈가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수척해져 지친 표정이다. 루슈디는 부인이 K-드라마 팬이라며 힘없이 웃어 보였다.
루슈디는 "젊은 날을 통째로 빼앗긴 것만 같다"며 "어지럽게 움직이는 세상을 쫓아가기도 힘들고, 아버지와 형들의 빈자리를 메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른다"고 말했다.



그는 "레바논은 살기 좋은 곳"이라면서도 언제고 부인과 딸을 다시 만나면 다시는 헤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베이루트에 있는 유엔난민기구(UNHCR)를 통해 미국이나 캐나다 이주를 신청하고 있다.
루슈디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제 시간에 잠들고 일어나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정규직을 갖고, 가족과 함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혼란 없이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리아 내전은 2011년 3월 '아랍의 봄'이 중동을 휩쓸던 당시 경제 위기 등 혼란상 속에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대를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시작됐다.
미국, 튀르키예, 러시아, 이란 등이 개입하며 전쟁 양상이 복잡해졌다. 지난 13년간 내전으로 60만명 가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60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d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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