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청춘만찬]김영진 한독 회장 “돌공병으로 들어갔다가 2등으로 전역한 군대가 인생의 전환점”

입력 2018-07-24 03:09   수정 2021-05-06 16:59

[CEO의 청춘만찬]

[캠퍼스 잡앤조이=이도희 기자] 김영진(62) 한독 회장은 창업주인 故김신권 한독 명예회장의 차남이다. 2012년,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으로 의약품 사업의 수익성이 폭락하면서 한 차례 위기를 겪었지만 김 회장은 공격적인 M&A로 돌파구를 찾아냈다. 2014년 태평양제약의 제약사업 부문을 손수 인수했고 덕분에 지금 한독의 효자상품인 ‘케토톱’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청춘시절을 되새겨 보는 잡앤조이와의 ‘청춘만찬’ 인터뷰에서 김영진 회장은 ‘인생을 바꾼 키워드’를 묻는 질문에 ‘군대’와 ‘독일’을 꼽았다. 김 회장은 “군대에서는 끈기와 함께 사람을 얻었고, 사회초년생 시절을 보낸 독일에서는 정도경영으로 가는 나침반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한독의 곳곳에는 김 회장이 독일에서 배워 온 ‘인간 중심’ 경영방침이 녹아 있다.
한독은 2006년 한독제석재단을 출범시켜 한독이 1960년대부터 진행해온 장학사업뿐 아니라 의·약학 연구 지원사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기존 한독의약박물관을 편입해 운영하고 있다. 2018년부터 서울시와 함께 치매환자를 돕는 ‘기억다방(기억을 지키는 다양한 방법) 캠페인’을 운영하고 있다. 당뇨병 극복을 위한 ‘당당발걸음 캠페인’과 ‘인간문화재 지킴이 캠페인’ ‘한독나눔봉사단’ 등도 있다.






[PROFILE]
김영진 회장

2006년 3월~한독(구 한독약품) 대표이사 회장
2002~2006년 3월 한독약품 대표이사 부회장
1996~2002년 한독약품 대표이사 사장
1992~1996년 한독약품 대표이사 부사장
1991~1992년 한독약품 경영조정실 전무이사

1984~1986년 독일 훽스트(Hoechst) AG 파견 근무

1984년 한독약품 경영조정실 부장


1984년 미국 인디애나대 MBA

1981년 ROTC 17기 전역
1979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사업가의 아들로서, 남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을 듯하다.
“얼마 전, 직원 한 명이 ‘집에서도 식사할 때 정장을 입고 계시냐’고 묻더라. 재미있었다. 다 드라마 때문이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집에선 편하게 러닝셔츠에 반바지만 입고 있다.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 하굣길에 분식집에서 떡볶이 먹는 게 최고의 낙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땠나.
“공부를 곧잘 했다. 친구들이 놀러 다닐 때도 집에서 책을 봤으니까. 중학교 때도, 당시는 고교 평준화 이전이라 원하는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 중3때, 급성 B형간염에 걸리면서 한 달간 입원을 했고 결국 시험에 떨어져 2지망 학교에 입학했다. 병만 아니었다면…. 너무 속상했다. 이건 여담인데, 전화위복으로 고등학교에서 평생의 은인이 될 친구를 만났다. 지금의 아내를 소개해준 것이다. 대학 1학년이 되자마자 아내를 소개팅으로 만났다. 그때만 해도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후에도 넉달간 50번이나 미팅을 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아내에게 끌리더라. 7년 연애 끝에 1981년 12월 결혼식을 올렸다.”



2012년 한독이 한독3.0 출범식을 열고 독자경영을 시작했다. 사진은 한독3.0 출범식. 사진=한독


-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모교인 중앙고 야구부가 굉장히 유명했다. 다 같이 학교 결승전을 보러 갔는데 아쉽게 패배하자 심판 판정에 항의한다며 함께 동대문 운동장에서 광화문까지 걸어서 데모를 했다. 당시는 프로야구가 없어서 고교야구 인기가 엄청났다. 결국엔 다 붙들려서 혼났지만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추억이다.”

-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나.
“군대다. 요즘 학생들이 들으면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28개월의 군 복무 기간이 정말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가 됐다.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 보고 싶어 대학 때 ROTC에 지원했다. 그런데 훈련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고되고 힘들었다. 당시만 해도 옛날식 군대였다. 훈련강도가 엄청 셌다. 폭염에 구보하다가 목이 마르면 논두렁 물을 그냥 퍼마시기 일쑤고 결국 한 명이 쓰러져 죽기도 했다. 그 과정을 다 거치면서 ‘세상엔 못할 게 없구나’라고 깨달았다.



△ 경상남도 김해 군 복무 당시 부모님과. 사진=한독


군대는 정신적인 가르침 외에 실질적인 가이드도 줬다. 임관 후, 경영학과 출신이니 당연히 경리에 지원하려 했는데 자리가 없더라. 대신 번역 장교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런데 번역 장교로 근무하며 뜻하지 않게 공병대로 배치됐다. 원래 공병은 주로 건축이나 토목 전공자가 가는데 관련 전공자 중 공병대에 지원한 번역 장교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12주 교육을 받는데 역시 절반은 건축·토목 내용이었다. 우리끼리 ‘돌공병’이라고 부를 만큼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처음부터 새로 공부해야 했다. 졸업 땐 전공자들을 제치고 2등을 해서 공병학교장 상을 받았다.(웃음) 아무튼 처음 공병 배치 당시는 전혀 생뚱맞은 부서라 많이 아쉬웠다. 그런데, 한독 근무 후 떨어진 첫 과제가 본사 건축이었고 군대에서 배운 건설 지식이 아주 톡톡히 쓰였다. 또 동기 60명과 지금도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데 대부분 건설사에 몸담고 있는 덕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 故김신권 창업주의 회사 설립스토리도 궁금하다.
“아버지도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다. 1944년도에 만주에서 약사보다 조금 아래인 ‘약종상(藥種商)’ 자격증을 취득하셨다. 중국 단둥(丹東)에서 처음 약국을 여셨다가, 이듬해 해방되면서 신의주로 옮겼다. 얼마 뒤,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아버지는 평양으로 쫓겨 갔는데 6.25전쟁이 터지고 1.4후퇴 때 부산까지 피난을 하셨다. 피난길에 조금 가져온 약을 그곳에서 좌판을 깔고 판매했는데 이게 지금 ‘한독’의 시초다. 당시 장사가 잘 돼 약국에 이어 수입 도매상까지 사업을 키우셨다. 1959년도에는 실제 약 제조도 시작했고 천신만고 끝에 당시 손꼽히는 기술력을 가진 독일 훽스트(Hoechst)와 제휴해 1957년 공장을 건설했고, 2년 뒤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명을 ‘한국·독일’의 약자인 ‘한독’으로 바꿨고 1964년 훽스트가 자본을 참여해 합작형태가 됐다.”





- 첫 직장은 어디였나.
“1984년 독일 훽스트에서 2년간 근무를 했는데 당시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독일은 말단 사원이 가장 먼저 퇴근하고 관리자들이 야근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근 국내에도 집중근무제가 도입되고 있는데 독일은 이미 그때부터 근무시간은 온전히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경영 시스템도 매우 투명했다. 예를 들어, 출장지에서 밥을 얻어먹으면 출장비에서 그만큼을 공제한다. 어느 날은 내 자리 전화기 앞에 영수증이 있어서 보니, 개인 통화내역은 월급에서 제했다더라. 당시 기획조정실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부서에서 근무했는데 그 때 회사의 모든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 2년 뒤, 귀국해 국내 기업에 입사했는데 완전히 정반대였다. 출근하면 부장들은 일단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거나 담소를 나눴다. 관리자의 업무는 ‘부하직원을 관리 감독하는 것’이라더라. 충격을 받고 독일에서 배운 ‘투명 경영’ 문화를 하나씩 도입했다. 가장 먼저 신문부터 없앴다.”



1986년 독일 근무 당시 동료들과. 왼쪽 두 번째가 김영진 회장. 사진=한독


- 한독을 경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나.
“1997년, 건강에 이상이 왔다. 다행히 열심히 치료를 받으면서 병도 조금씩 호전됐는데 10년 뒤, 재발해 버렸다.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사노피와의 파트너십을 위해 독립경영을 시작한 터라 일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그 즈음, 놀이공원에서 한독 임직원 및 가족 초청행사가 열렸는데 내 앞에 서있는 한독의 가족들을 마주한 순간 ‘아, 이 사람들과 함께 한 약속들을 지켜야겠구나. 대한민국에도 제대로 하며 성장하는 제약회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다시 결심했다.”



△ 2015년 직원들과 트래킹 간담회에서. 가운데가 김영진 회장. 사진=한독


-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직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긍정과 열정’이다. 우리나라는 30여 년간 엄청난 발전을 했다. 직접 만난 많은 글로벌 회사들도 한국의 발전에 대해 궁금해 하고 놀라워한다. 그런데 지금 청년들은 ‘헬조선’ ‘헬코리아’라며 우리나라의 미래가 안 보인다고 한다. 젊은 이들이 긍정적이고 열정적으로 앞을 봐야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 지레 겁을 먹고 부정적으로 스스로 변명거리를 만들기 보다는 긍정과 열정의 마인드로 대한민국 미래를 밝게 그리는데 앞장섰으면 한다.”

tuxi0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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