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말더듬증으로 친구들에게 놀림 받아 평행봉 등 운동에 몰두
-부산시장 권한대행 당시 열린우리당 공천 받아 정치 입문
-3전 4기 도전 끝에 민선 8기 부산 시장 당선
-청년 취업역량 강화사업·취업준비땅·드림옷장 등 청년 취업 위해 다양한 지원책 마련
[캠퍼스 잡앤조이=강홍민 기자] “어릴 적엔 덩치가 왜소하고 키도 작았어요. 말더듬증이 있어서 친구들한테 놀림을 많이 받았지요. 그래서 운동을 더 열심히 했어요. 지금 이래봬도 팔굽혀펴기 100개는 거뜬합니데이.(웃음)”
민선 3기, 4기, 6기 부산 시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시고 절치부심으로 네 번째 도전 끝에 부산 시장에 당선된 오거돈 시장은 흡사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를 보는 것 같다. 아마도 오 시장의 끈질긴 근성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고철을 주워 팔며 생계를 이어 온 부모님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어릴 적 아버지의 넋두리를 듣고 공직자의 꿈을 키웠다는 오 시장의 청춘시절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거돈 부산시장
민선 8기 부산시장 당선(2018.07~)
제5대 한국해양대학교 총장(2008.03~2012.03)
제13대 해양수산부 장관(2005.01~2006.03)
동아대 대학원 행정학 박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서울대 철학과 졸업
-늦게나마 시장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해주세요.
이 나이에 됐는데 축하는 무슨 축하입니까.(웃음) 시장이 되고 싶어서 도전한 게 세 번인데, 세 번 다 떨어졌어요. 이번에는 안 나올라고 했는데 나갈 사람이 없어서 나갔습니다. 저 마저도 안 나가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해 목숨 걸고 나갔지요.
-어떤 각오로 시정을 이끌어 나가실 건가요.
부산이 오랜 세월동안 고인 물이 돼 있어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나 갈등이 깊습니다. 새로 검토해봐야 할 문제도 많아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고요. 이 난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갈 생각입니다.
-부산 토박이로 알고 있습니다.
고향이 부산 중구 부평동입니다. 부모님께서 국제시장에서 구루마를 끌고 다니시면서 고철 주워 팔아 돈을 모아서 국제시장에 가게를 하나 얻기도 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지금은 이래봬도 학교 다닐 땐 싸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웃음) 어릴 때 키가 작아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애들이 이름을 갖고 놀리고도 하고, 심한 말더듬이어서 제 말투를 가지고 놀리기도 했죠.
친구들 무리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싸움뿐이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집 마당에 있는 평행봉을 하면서 체력을 길렀고, 시장통에서 싸움 기술을 익혔지요. 덩치가 크건 작건 놀리는 아이들은 무조건 싸움을 했습니다. 코피가 날 때까지 주먹으로 두들겨 패주니까 그때부터 놀리지 않더군요. 노래도 좋아했습니다. 제법 음감도 있고 노래를 좋아해 음악 수업을 좋아했었고, 중·고등학교 땐 라디오를 끼고 살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었죠.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초등학교 때 남포동 극장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었죠. 50년대 말 지금의 남포동 PIFF 광장 부근에 부산, 동아, 국제, 제일극장들이 있었는데, 영화관을 옮겨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영화를 봤었죠. 초등학생은 성인요금의 절반을 냈고, 더 어린 아이들은 무료입장이었는데 전 워낙 키가 작아서 초등학교 고학년때까지도 무료로 통과했었습니다. 극장 앞에 서 있다가 마음씨 좋아 보이는 어른 뒤에 붙어서 “같이 들어 가입시더”하면 대부분 웃으면서 같이 들어가 주셨지요.(웃음)
-어릴 적 말더듬증으로 고생하셨는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말더듬증으로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국어시간에 돌아가면서 책을 읽을 때마다 진땀을 뺐던 기억이 있어요. 심한 말더듬증 때문에 애를 써도 책 몇 줄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죠. 친구들이 뭘 물어도 속에선 말이 나오는데 입만 열면 나오지가 않아 끝까지 들어주는 친구가 없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노래는 막힘없이 부르는 걸 알게 됐죠. 합창단에서 열심히 연습하고, 대회에서 상을 받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말 더듬는 것도 못 이겨내면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에 수업시간마다 꼭 한 번씩 손을 들고 발표하기도 했었습니다. 약점이나 한계의 정체가 무엇인지 냉철하게 돌아보고 신이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학창시절 꿈은 무엇이었나요.
그때만 해도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전쟁 이후 혼란기였고, 공무원이 국민 위를 군림하던 시절이었죠. 아버지께서 약주를 한잔 하시는 날이면 “우리 집안에 동직원이나 순사 하는 놈 하나 없나”라는 넋두리를 하셨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아버지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곤 했었죠. 크면서 그 꿈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행정고시라는 걸 접하고 공무원을 준비했습니다. 스물넷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를 먹고서야 제가 가야할 길을 찾게 된 거죠.
-공직자의 꿈을 품다가 정치로 입문하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
2004년 안상영 前부산시장 권한대행으로 시 행정 공백을 메우고 있던 중에 당시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아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부산 시장 선거에 3번이나 낙선을 하셨는데, 굳이 도전을 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당시 부산에서는 빨간 깃발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죠. 주변의 반대가 참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발전을 위해 출마를 결심했었죠. 당시 선거 참패에도 제가 의연할 수 있었던 건 그래도 명분 있게 싸웠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부산시의 가장 시급한 문제, 그리고 해결책도 제시해 주시죠.
현재 국가적으로 고용률 저조와 같은 일자리 문제가 최고 화두입니다. 부산도 마찬가지로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고, 조선이나 자동차 등 주력산업의 불황으로 일자리 여건이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경제체질 개선이 시급합니다. 해결 방안은 시장 직속 일자리위원회를 통해 일자리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강화하고, 뉴딜사업에 지역기업과 주민이 참여해 일자리를 스스로 만드는 상향식 일자리 정책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청년 실업문제도 국가적으로 심각한 수준인데요. 부산시에서 추진 중인 청년 취업 관련 사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부산도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선 대학과 연계해 청년 취업역량 강화사업을 운영 중이며, 부산권 대학 취업네트워크 활성화 사업 및 청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스마트폰 역량강화 프로그램인 ‘취업준비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기업이 원하는 현장적응 프로그램을 설계·이수 후 취업으로 연계하는 ‘대학학과별 맞춤형 취업지원 사업’과 취업면접을 위한 정장대여 서비스 ‘드림옷장’, 미취업 청년들에게 구직활동비를 지원하는 ‘청년디딤돌카드’도 하반기 1,100명을 추가로 선발했습니다. 미취업 청년들을 대상으로 개인 실력 향상과 취업부터 창업까지 단계별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부산시에서 운영하는 청년 주거안정을 위한 사업을 소개해 주세요.
사회초년생이나 신혼부부, 대학생 등 젊은 계층들의 주거불안 해소를 위해서 마련된 사업인데요. 주변시세보다 저렴하게 공급하는 행복주택, 드림아파트, 셰어하우스, 햇살둥지 사업 등 청년주거안정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행복주택은 교통이 편리하고 접근성이 좋은 역세권에 위치한 부지를 활용해 건립하고 있습니다. 공급물량 중 80%를 사회초년생이나 신혼부부, 대학생들에게 공급하고 있습니다.
-타 지역과 차별되는 청년 정책이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일자리정보망이나 학과별 맞춤형 훈련, 취업준비땅 프로그램은 부산만의 특색있는 사업인데요. 대표적으로 청춘드림카와 청년보안관이 있습니다. 청춘드림카는 서부산 산업단지 등 교통 취약지에 위치한 중소기업에 취업한 청년들에게 전기자동차를 임대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교통여건 때문에 발생하는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소하기 위해 부산시에서 최초로 기획한 사업이고, 미세먼지 저감과 같은 친환경정책에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올해 정부 3.15 청년대책의 우수사례로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을 청년보안관 사업은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문화지원, 소외대상 발굴관리, 마을정보 알림 등 청년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활동하는 사업입니다. 청년들의 참신한 기획을 통해 지역공동체를 발전시키고 동시에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사업이라 자부합니다.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삶의 매순간 저에게 늘 각인시켜온 말은 바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이 고사성어에 대해 ‘결과를 하늘의 뜻에 맡긴다’를 무책하다고 보시는데,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어떠한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는 과정입니다. 우리 청년들도 최선의 도리는 다 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전해주시죠.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라는 헬렌켈러의 말처럼 한쪽 문이 닫혔다고 크게 좌절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향해 열린 또 다른 문을 찾아 나서면 되는 것이니까요. 살면서 힘든 일이 생기는 순간일수록 나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멈춰 서 있는 힘든 시간이 있어야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는 법이니까요.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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