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승현 기자 ] 지난 2월10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임종을 앞둔 93세의 노(老)회장에게 의사가 물었다. “회장님,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나요.” “음, 내가 원하는 색상, 원하는 품질의 물감이 나왔을 때야.” 그리고는 병상을 둘러싼 가족에게 유언을 남겼다. “한국에서 세계적인 화가가 나왔으면 좋겠어. 젊은 화가를 많이 발굴해줘. 그리고 직원들을 형제처럼 생각해 함부로 하지 말아라.”
1969년 700여차례의 실험 끝에 국산화에 성공한 포스터칼라 ‘알파700’, 1981년 세계 여섯 번째로 개발한 아크릴칼라, 1985년 국내 첫 마커펜 개발의 주인공인 ‘한국 그림물감의 아버지’ 전영탁 알파색채 회장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9개월 남짓. 고인 뜻에 따라 대한민국 청년작가상 전시회가 열린다. 6월 한국미술협회에 1억원을 기탁, 40년 만에 청년작가상을 만든 남궁요숙 알파색채 대표(83·사진)를 23일 서울 평창동 알파색채 본사에서 만났다.
“물감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죠. 50년을 그림물감 만드는 데 다 쏟아부었어요. 연구에 400억원 이상이 들어갔죠. 그것도 모자라 유언까지도 세계적인 화가를 발굴해 키우라고 남기더군요. 1972년 창립 10주년 때 청년작가상을 만든 이후 40년 만에 부활시킨 겁니다.”
28일부터 내달 4일까지 서울 인사동 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수상작 전시회에는 모두 99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들 중 대상 1명에게는 유명 아트페어 개인전을 열어주고, 최우수상 2명에게는 물감과 화구 등을 제공한다.
남편의 유언을 들려주며 눈물을 훔친 남궁 대표. 그는 전시회에 맞춰 남편과의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회고록도 출간했다. 제목은 ‘아름다운 색과 함께한 길’. “작은 아들과 출판사에서 제목을 바꾼 거에요. 원래 나는 ‘바보 같은 사랑’이라고 하고 싶었어요. 그이나 나나 둘 다 바보같이 사랑했거든요. 물감 국산화에 대한 열정도 열정이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나 존경이 없었다면 60년을 큰 갈등없이 살 수 없었겠죠.”
“100살까지 해로하자”고 약속했다는 남편 생각에 또 한 번 눈물을 닦아낸 남궁 대표. “100살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평생 병원 한번 안 갔던 양반이 딱 1주일 아프더니 훌쩍 떠나더군요. 그래도 나한테 부탁한 일은 해내야죠. 전 세계에서 한류 바람이 불지만 미술 분야는 아직 조용해요. 젊은 작가 발굴해서 꼭 세계적인 화가로 키워낼 겁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현역 CEO(최고경영자)로, 법제처 국민법제관으로, 서울상공회의소 종로구상공회 부회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남궁 대표. 계획을 밝히는 그의 눈빛은 ‘할머니’가 아니었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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