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TV에 회사이름만 나와도 '철렁'…때마다 사건…휴가 언제 가보나

입력 2013-02-04 16:54   수정 2013-02-05 05:26

홍보·대관 담당자의 애환
회식서도 이어폰끼고 뉴스 청취…꽃등심 먹어도 먹는 게 아니야

'을 중의 을' 홍보맨…입 잘못 벙끗했다간 낭패
기대하던 해외 포상 휴가…순서 되자 일 터져 물거품
새벽출근·저녁마다 술자리…친구는 다 사라져버렸네




“광고나 드라마에선 젊고 아름다운 여사원들이 선망하는 부서죠. 가끔 귀한 집 자제들이 낙하산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그런줄로만 알고 손들었는데, 웬걸….”

황 대리의 환상은 기획부서에서 홍보팀으로 이동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깨졌다. “보도자료 내일 나오나요”라고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너무 ‘친절하게’ 답변한 것이 화근이었다. 본인이 관여한 프로젝트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준 것. 덕분에 이 ‘운 좋은’ 기자는 다른 기자들보다 빨리 기사를 쓸 수 있었다. 홍보팀은 발칵 뒤집어졌다. 색출작업은 간단히 끝났다. 그 후 황 대리는 말수가 부쩍 줄었다.

직장생활은 ‘甲과 乙의 함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전부라고 했던가. 기자나 정부 부처 관계자들을 상대로 ‘乙’이 돼야 하는 기업체 홍보맨과 대관업무 담당자들의 비애와 고충을 들어봤다.

◆소개팅에서도 ‘기자님’…직업병

대기업 홍보팀에서 근무하는 송 대리는 친구가 잡아준 소개팅에 ‘꽃단장’을 하고 나갔다. 그러나 약속 시간 40분이 지나도록 소개팅 남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부아가 치민 그녀는 ‘어떤 화상인지 얼굴이라도 보고 가자’며 잔뜩 벼르면서 기다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남자는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김OO입니다”라며 명함을 건넸다. 이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명함에 박힌 ‘기자’라는 두 글자. 그녀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아닙니다. 기자님. 저도 방금 왔는 걸요.”

이 대리는 홍보팀으로 옮기기 전에는 뉴스를 볼 때 어떤 아이템이든 회사 얘기가 나오고 로고가 보이면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그러나 홍보팀으로 옮긴 뒤에는 회사 이름만 들어도 일단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집에서도 시간 날 때면 틈틈이 검색창에 회사 이름뿐 아니라 오너와 사장들 이름까지 하나씩 다 쳐본다. “예전엔 경쟁사의 안 좋은 뉴스가 나오면 ‘왜 저런 짓을 해서’라며 혀를 끌끌 찼는데 이젠 ‘에휴, 저기 홍보팀 엄청 고생하겠네’라며 불쌍하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어요.”

◆“내가 네 시다바리냐”

모그룹 대외협력팀의 회식자리엔 꼭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 팀원이 한두 명씩은 있다. 방송 뉴스를 모니터링해야 하는 당번이 DMB로 뉴스를 보고 있는 것이다. 팀 막내라 모니터링 당번도 더 자주 맡는 서 사원의 얘기다. “그래도 평일에는 일이라 생각하니 괜찮아요. 주말에 가족들끼리 하는 오붓한 식사 자리에서도 이러고 있어야 할 때면 서글퍼져요.”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나온 조 과장의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얼른 끄고 수신번호를 확인해 보니 모 매체 기자 이름이 떠있다. ‘무슨 급한 일이기에 토요일 오후에 전화를 다 했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어두운 영화관을 더듬어 밖으로 나와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회사 근처 맛집이 어디냐고 물어온다. 오랜만에 시골에서 부모님이 오셨는데 시내 맛집을 미리 못 알아 봤다는 것. 조 과장은 한식, 중식, 일식, 양식으로 다양한 맛집을 추천해준 뒤 전화를 끊고 나자 가슴속 깊이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무슨 네 시다바리냐.’

대기업 홍보팀의 K팀장은 지난해 학수고대하던 해외 휴가를 받았지만 반년이 넘도록 쓰지 못하고 있다. 장기 근속자들에게 해외 여행을 보내주는 복지제도가 있는데, K팀장의 차례가 오기 직전에 사건이 터진 것. 오너가 배임 혐의로 형사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휴가는 없던 일이 됐다. 되레 그 사건과 관련된 기사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지경이다. “근속 휴가권 만료 기간이 올 상반기까진데, 그때까지 재판이 끝날 수 있을까요. 놓치고 다시 받으려면 이미 정년 퇴직 시기일 것 같아요.”

모 건설사의 L홍보팀장도 지난해 여름 1주일 휴가를 받아 지방에 내려갔다가 하루 만에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휴가 첫날 이 건설사 현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취재진이 몰려든 것. “올해는 좀 제대로 보내나 했는데, 하늘로 솟는 검은 연기처럼 제 휴가도 그렇게 날아갔답니다. 휴가 땐 꼭 일이 터지죠. 이젠 가족들도 그러려니 해요.”

◆만날 술이야

소비재기업 3년차 홍보맨 유 대리는 지난해 건강검진을 받고 가슴이 덜컥했다. 30대 초반인데 지방간과 고지혈증이 생긴 것이다. 사수인 최 과장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 다 그런 거야. 홍보맨의 간은 그래서 ‘시골간(지방간)’이라고 하잖아. 군인에게 무좀, 관절염, 요통이 친구이듯 홍보맨들에게도 지방간과 고지혈증이 친구라고 생각하면 돼.”

박 대리는 대관업무를 맡은 후 두세 달 만에 체중이 8㎏ 가까이 불었다. 거의 매일 이어지는 술자리 때문이다.

대관부서 황 과장은 지난주 울분이 터져 구내식당에서 동기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전날 밤 ‘술집 야근’으로 숙취에 시달리는 그에게 동기가 “매일 공짜로 술 마시고 주말마다 골프쳐서 아주 좋겠다. 누군 놀러다니면서 월급받네”라고 비아냥거렸기 때문이다. “평일, 주말 없이 공무원들 만나 못 먹는 술 먹는 것도 고역인데, 속 모르는 사람들은 ‘놀고 먹는다’고 째려 보니 억울합니다.”

◆마루타 홍보맨

식품업체에서 홍보를 하는 최 대리는 ‘마루타’로 통한다. TV 프로그램용 촬영 협조 요청이 있을 때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본인이 직접 그 제품 마니아가 되어 인터뷰에 나서기도 한다. 한번은 과일식초 촬영이 있어 하루 종일 다양한 공간과 상황에서 식초를 마시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문제는 거듭되는 NG. 그날 최 대리가 마신 과일식초의 양만 1.8ℓ. “쓰린 속 때문에 며칠 동안 약을 먹으면서도 TV에 나온 제품의 모습에 웃음을 머금게 되더라고요. 홍보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묘한 희열이랄까요.”

◆식당에선 ‘사주 경계’를 하며

대관업무를 담당해 회사보다는 정부 청사나 국회 근처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 과장은 간혹 회사 동료와 그 인근에서 식사할 일이 있을 때는 ‘경계 모드’로 들어간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버젓이 있다가는 정부 부처의 지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당을 가면 무조건 구석자리에, 그것도 입구를 등지는 방향으로 앉는 버릇이 생겼다. “단, 계산하러 갈 때는 최대한 두리번거리지 않고 고개를 푹 숙여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마주치면 스폰서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그게 저녁이라면 그날이 바로 회식날이죠. ㅠㅠ.”

윤정현/고경봉/정소람 기자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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