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민 <연세대 교수·경제학 leejm@yonsei.ac.kr>
한국 경제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50~60대 가장으로 기업에서 일한 분들의 모습에서 그 문제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중에는 진짜 ‘엘리트’도 많았다. 이들은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에 따라 관료로서 출세하기보다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고자 했던 ‘진취적’ 사고방식을 가진 엘리트였다.
그들은 어떻게 일했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수출드라이브 하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바이어에게 기생파티를 열어주기도 하고, 낯선 외국에 나가 시장을 개척하고, 중동 사막에 가서 몇 년간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냈다. 세계 최장 근로시간의 스트레스를 술 회식 문화로 달래느라 위궤양, 간경화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나갔다. 그렇게 일하는 것이 고달팠지만 나라 경제도 성장하고, 회사도 자라고, 자신도 승진하는 보람이 있었다. 세계를 상대로 뛰는 것을 ‘멋있게’ 봐 주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다.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은 무엇보다 1997년 외환위기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직장을 잃었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았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놀고먹는’ 고액연봉자 취급을 받아 해고됐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한국적 ‘연공서열제’ 하에서 젊어서는 생산성 이하를 받고 일했지만 이제 나이 들어 생산성 이상으로 받게 된 것인데, 그런 시점에서 해고된 것이다.
해고된 뒤에는 어떻게 됐나. 퇴직금으로 자영업을 해서 망하는 것은 잘 알려진 코스다. ‘연줄’이라도 있으면 도산 기업의 법정관리인이나 감사 같은 자리라도 걸리겠지만, 그것도 보수는 형편없다. 하기야 하는 일도 별로 없는데, 많은 보수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위기 후 새로 도입된 ‘사외이사’를 보니 진짜 하는 일은 없는데 보수는 비교가 안 되게 많다.
그 사외이사들은 누구인가. 기업 일은 해 본 적 없는 ‘전관’이거나 관변인사, ‘저명 교수’ 등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외이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너무 먼 비교대상이다. 끝을 맞추어 보니 9급 공무원 출신도 어지간한 대기업 출신보다 나아 보인다. 연금 혜택도 많고, 퇴직 후 ‘비빌 곳’도 많다. “나도 일찌감치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에 따른 진로를 택해야 했다”고 생각해도 물론 늦었다. ‘후회막급’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가장이 자녀에게 어떻게 말할까. 자신처럼 세계를 향해 뛰는 기업인이 되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 공무원이 되라고 할 것인가. 고위 공무원이 못되면 하위 공무원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을까. 저명 교수가 못 되면 보통 교수라도 하고, 대학 직원이라도 되라고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얘기도 블루칼라 근로자 가장에게는 꿈같이 들릴 것이다. 이들도 지난 50여년간 세계 최장의 근로시간과 최고의 산업재해율을 뚫고 경제기적을 이뤘던 주역이다. 이들은 어려서 교육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해서 엘리트 사원들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 그런 차별이 자녀 대에도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 자녀들은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다.
문제는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의 사고방식이 경제 전체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전통사회식 가치관으로 회귀하는데 한국 경제가 역동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성장이 안 되면 블루칼라 근로자 문제도 해결이 불가능해진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50~60대의 몰표에 힘입어 당선됐다. 이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인을 ‘뛰게’ 했다는 그들의 집단기억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박 대통령도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기업 활동으로 다시 한 번 뛰어 보자고 나선 모습이다.
그런 노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업 활동에 진짜 엘리트들이 투신하려 하는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50~60대가 됐을 때 부모 세대의 경험과 달리 기업인이 되기로 한 것이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도록 할 조건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총리부터 시작해 ‘전관’을 위주로 한 새 정부 인사는 문제가 있다. 앞으로 다른 방식으로라도 이 문제를 보완해야 할 것 같다.
이제민 <연세대 교수·경제학 leej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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