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춘향과 방자

입력 2013-06-12 17:32   수정 2013-06-13 05:17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5·16이 터지기 석달 전인 1961년 2월. 설 극장가에 ‘춘향전 전쟁’이 벌어졌다.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과 홍성기 감독,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이 맞붙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감독과 배우가 부부 사이인 이들의 대결에서 ‘성춘향’은 최고 관객 기록을 세우며 압승했다. 개봉 74일 만에 서울 인구 250만명 중 38만명을 동원했으니 그야말로 ‘초대박’이었다.

그 성공 요인 중 하나가 방자 허장강과 향단 도금봉의 코믹 연기였다. 당시 혼란스런 사회에서 관객들은 이들의 좌충우돌 해프닝에서 웃음과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방자를 앞세운 영화는 1972년 ‘방자와 향단이’를 거쳐 2010년 ‘방자전’에서 정점을 이룬다. ‘성춘향’ 때 너무 못생겨 이몽룡 대신 방자 역을 맡았다는 허장강의 비애가 ‘방자전’의 모티브였다는데, 춘향이 방자를 홀린다는 내용 때문에 춘향문화선양회가 상영중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원본 ‘춘향전’은 한국의 민족문화 100대 상징이자 가장 많은 외국어로 소개된 고전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방자는 능청스런 태도로 상전의 사랑을 이어주는 중개자다. 판소리 ‘춘향가’ 중 방자가 춘향을 부르러 가는 대목을 보자. ‘방자 할 일 없이 춘향 부르러 건너간다/맵수 있는 저 방자 태도좋은 저 방자/풍에 나비 날 듯 충충거리고 건너가/춘향 추천허는 앞에 빠드드드득 들어서며/ 아나 옛따 춘향아…’

빠른 장단의 자진모리로 넘어가는 이 대목은 까불거리고 장난기 많은 그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밤에 몽룡과 함께 춘향집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그의 너스레는 최고조에 달한다. 밤인데 상하를 따져 뭐하느냐, 날 방자로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불러달라, 내 이름을 아버지다, 안 불러주면 못 간다며 한껏 딴청을 피운다.

사실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방자(房子)는 조선시대 지방관아에서 심부름하던 남자종의 통칭이다. 마당놀이 ‘방자전’과 박상률 장편 ‘방자 왈왈’, 판소리소설 ‘배비장전’에도 방자가 등장한다. 영화판에서는 이런 ‘방자형 인물’을 삼류배우의 일본말인 ‘산마이(三枚)’로 부르기도 한다.

어제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 당국회담이 대표의 ‘격’ 문제로 결국 무산됐다. 그런데 34년 전에도 격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남북 대치상황이 첨예했던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춘향이(남북조절위부위원장)를 나오라고 했는데 방자(조국전선 대표)가 나온 꼴’이라며 “무책임한 기만을 공박하라”고 한 회의 문건이 이를 말해준다.

하긴 고려시대에는 사신과 수행원이 머무는 곳의 일꾼을 방자라고 불렀다는데, 그렇다고 지금 방자와 향단에게 ‘몸종 회담’을 맡길 수도 없고, 참….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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