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잣대만 중시한 탓 아닌지
스스로 즐기며 감성의 힘 쌓아야"
김다은 <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daeun@chugye.ac.kr >
40년도 더 지난 어린 시절에, 흑백 TV 속에서 한 서양남자가 지휘봉을 들고 무대 위에서 춤추듯 온몸으로 지휘하는 모습에 매료된 적이 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는데, 그의 열정적인 몸짓과 처음 본 악기들이 쏟아대던 선율은 지금도 잊지 못할 꿈같은 장면이다.
연주회는 상상조차 못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 정도나 알던 당시에, 비올라 첼로 피콜로 플루트 오보에 바순 튜바 트롬본 베이스드럼 등 그 놀라운 악기들의 조화로운 움직임이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신기의 영역 같았다. 그 명성 높은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 속에서 유독 눈길을 잡아 끈 사람이 있었으니, 트라이앵글을 땡땡거리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단순한 연주자였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재미있어 했고,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음악이 성큼 우리에게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 기억이 떠오른 것은 항간에 알려진 나라별 중산층의 기준을 비교해놓은 한 신문기사를 읽고 난 뒤였다. 필자의 중산층 여부는 ‘아니오’와 동시에 ‘예’였다. ‘아니오’인 이유는 우리나라의 중산층 척도인 대출 없는 30평대 이상의 집, 500만원 이상의 월급, 2000cc급 이상의 중형차, 1억 원 이상의 예금 잔고, 1년에 한번 이상 해외여행이라는 기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인 이유는 ‘외국어 하나 정도는 할 수 있고, 즐기는 스포츠가 있으며,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고,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은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경기불황에 따른 우리나라 중산층의 심리적 몰락이 심각하다고 한다. 통계적으로 중산층은 중위소득의 50~150%를 지칭하는데, 환산하면 175만원에서 525만원 사이가 된다. 최근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산층은 67.5%인데, 국민의 50% 이상이 자신을 빈곤층 혹은 소외계층이라고 느끼고 있다. 인간의 척추처럼, 나라의 버팀목과 다름없는 중산층이 통계 수치를 넘어 심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항간의 선진국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중산층도 필자의 경우처럼 다른 양상을 나타내지는 않을까. 미국의 기준인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약자를 도우며 불의에 저항하고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는’ 부류가 과거보다 많아지지 않았을까. 더구나 프랑스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구(區)마다 동(洞)마다 문화 아카데미가 생겨나 악기나 스포츠 그리고 특별한 요리 솜씨를 뽐내는 감성족의 숫자가 과거에 비길 바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형 중산층이 늘어나고 있는데, 경제적인 잣대만으로 우리 스스로 추락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문화 향유도가 점점 높아지면서도 스스로 문화 중간층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라는 또 다른 경제적 척도 때문이다. 문화자본주의적인 인식으로 경제력이 높을수록 고급문화를 즐긴다고 여기는 것이다. 문화적 향유 대상을 평가할 뿐 그것을 즐기는 자신의 감수성을 평가하지 않는다. 악기를 배워도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워야지 하모니카나 기타는 ‘B급’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의 상류층과 중류층의 문화 소비양식을 지칭하는 옴니보어(omnivore)는 고급과 저급을 분류하지 않는다. 자신이 스스로 즐기고 느끼는 것이 높을수록 고급이지, 사전에 예술이나 문화 자체가 고급 저급으로 분류될 수 없다는 뜻이다. 싸이의 세계적인 성공도 문화적 옴니보어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시점에서 감성적 중산층을 우뚝 세우는 운동을 하는 것이 경제적 중산층을 복원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카라얀은 지휘하는 내내 눈을 감은 상태였는데 신기하리만큼 수많은 연주가들을 제압하듯 잘 이끌었다. 눈을 감고도 세계를 감동시키는 감성적인 힘이 결코 경제적인 힘보다 작지 않기 때문이다.
김다은 <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daeun@chugye.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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