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지붕들로 빼곡한 시화공업단지 안에 맛있기로 소문난 구내식당이 있다. 옆 공장들까지 '맛탐방'을 다녀올 정도다. 맛의 비법은 날마다 이곳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제습기 회장님'. 음식의 간이 맞지 않거나 식단이 반복되기라도 하면 공장 조리사와 영양사들은 매번 불려가 혼쭐이 난다.
'어려운 직원들의 심정을 이해하려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고 믿고 항상 공장으로 나가는 윤희종 위닉스 대표이사 회장(66·사진)은 먹거리부터 챙기는 오너다. 지독히도 힘들었던 가정형편 탓이다.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 주위를 뽀송뽀송하게 만드는 제습기. 요즘 그야말로 없어서 못판다는 주부들의 필수아이템이다. 무명에 가까웠던 제습기가 일약 스타 가전으로 떠오른 셈이다. 과거 듣도 보도 못한 김치냉장고가 주부들의 애장품 목록 1순위로 뛰어오르던 분위기와 비슷하다. "집에 제습기 하나 들여 놔야지"라는 말이 주부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장이 만든 제습기도 이렇게 '입 소문' 하나로 글로벌 대기업을 누르고 가정용 제습기 시장을 열어제쳤다. 장맛비 내리는 날에 먼지가 나도록 바쁜 '물먹는 제습기'의 일인자를 경기도 성남시 판교 영업본부에서 만났다.
◆ 가족부양 위해 올라온 서울 그리고 독학으로 탄생한 국산 '냉장고용 열교환기'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늘 시화공단으로 나와 공장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밥을 먹어요. 무엇보다 내 입맛에 맞아야 직원들도 만족할 수 있는 한 끼가 될 테니까요. 등교하는 아이보다 먼저 나와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이 공장직원분들입니다. 납품은 절대 받지 않고 영양사와 조리사를 따로 뽑아 요리를 맡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느 기업들과 다르게 구내식당 안에 윤 회장의 지정좌석은 없다. 간혹 경력이 얼마 되지 않은 직원들은 인사없이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하루 세끼 밥을 챙겨먹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워 영남대(전자공학과)에 들어가자마자 학업을 포기한 윤 회장은 오로지 가족부양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중소 가전업체에 다녔다. 그리고 기술만 파고든 덕분에 입사 5년 만인 1973년, 독학으로 '냉장고용 열교환기'를 국내 최초로 만들었다. 이 기술로 세운 회사가 바로 위닉스의 전신인 유신기업사다.
"40여년 전엔 창업이라고 해봐야 가내수공업 수준이었어요. 혼자 기술을 개발해 제품도 만들고 판로 개척까지 스스로 해야했죠. 마침 삼성전자가 냉장고를 만들고 있었는데 주요 부품들이 모두 일본에서 수입된 것들이었어요. 일본 부품을 국산화하면 지금의 벤처기업 대우를 받을 수 있어서 냉장고의 핵심부품인 냉각기(열교환기) 국산화에 하루종일 매달렸죠."
이렇게 탄생한 윤 회장의 냉장고용 열교환기는 1977년부터 삼성전자 냉장고에 장착돼 전세계로 수출됐다. 윤 회장은 이때부터 기술이전과 특허권 사용 등 삼성전자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대표적인 동반성장 성공사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제습기는 통풍기 같은 날개(팬)를 이용, 실내에 있는 공기를 물로 응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습기가 열교환기에 닿았을 때 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열교환 사이클 기술이다. 이 기술은 냉방기기나 정수기에도 쓰인다.
"스스로 기술을 배워 만든 열교환기가 실제 장착되기까지 물론 쉽지는 않았어요. 하루에도 10여 차례씩납품할 곳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지만 20대 청년이 만든 제품을 믿고 써주는 곳은 거의 없었지요. 그래도 삼성전자 납품을 위해 끈질기게 도전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한 우물' 열교환기만 파고들어 만든 제습기, 글로벌 대기업을 누르다
비로소 삼성전자와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안정을 되찾은 윤 회장은 열교환기를 이용해 습도 조절이 가능한 제습기 개발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1999년 3월 윤 회장의 첫 제습기가 시장에 나왔지만 소비자들 사이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사실상 시장 조사에서 실패한 셈이다. 제습기는 최근까지도 연간 1000대 이상 팔린 적이 드물 정도로 지난 10여년 동안 극심한 판매 부진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는 언젠가 열릴 '틈새 시장'을 기대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기업에 냉장고용 열교환기를 납품하면서 매출도 꾸준히 늘었어요. 이후로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전기 냉온수기도 만들어보고 공기청정기 개발에도 뛰어들었죠. 그런데 이미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일본 등 선진시장에선 가정용 제습기가 보편적으로 팔리더라구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내에서도 제습기가 틈새 가전제품으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가정용 제습기는 2013년에서야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기후가 빠르게 고온 다습한 아열대성으로 변화하고 있는데다 베란다가 없는 주상복합형 건물이 늘어나면서 빨래 건조용으로까지 제습기의 용도가 무한 확장됐기 때문이다. 제습기와 선풍기를 동시에 틀면 기온 하강 효과도 뛰어나 전력비용 절감을 위한 필수 가전제품이란 '입 소문'도 급속히 퍼져나갔다.
특히 ‘절전 특수’가 한 몫 했다. 정부가 여름철 전력 소비를 줄이기 위해 실내 온도 규제에 나선 게 기름을 부었다. 실내 온도를 26도 이하로 낮추지 못해 사용이 줄어든 에어컨 인기는 시들해진 반면 습도 조절로 체감온도를 낮춰주는 제습기가 반사이익을 얻었다는 게 업계의 해석이다. 업계에서는 정부 덕에 제습기가 ‘실내 공기 관리기’를 넘어 ‘냉방기기’로 발돋움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전기요금 부담을 덜어준 것도 인기 요인이다. 제습기의 평균 소비전력은 시간당 300W 수준으로 선풍기보다 다소 많지만 에어컨에 비해선 20% 수준에 불과하다. 가격은 30만~40만원대다.
"무엇보다 제습기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는 소비자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만족도가 높았기 때문이에요. 장마철에 제습기를 가동하면 실제로 10리터 가까이 물이 나오는데 도대체 이 물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매우 신기한 일인 것이죠. 여지껏 팔리고 있는 가전제품 가운데 제습기만큼 소비자 만족도가 높은 제품은 본 적이 없습니다."
위닉스의 제습기는 주로 TV홈쇼핑과 하이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다. 물론 이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할인마트에서도 구입할 수 있지만 이 두 곳이 주요 판매처다. 여기엔 '입 소문'을 내주는 40대 주부를 주로 겨냥한 고도의 판매 전략이 숨어있다. 위닉스는 앞으로도 두 곳의 판매채널을 통해 대량으로 제품을 공급할 계획이다. 이 덕분에 홈쇼핑업체들은 판매 신기록을 세우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롯데홈쇼핑은 본격 장마를 앞둔 5월 중순께 일주일 동안 위닉스 제습기를 론칭해 '시간당 매출액 23억원, 분당 5200만원'이란 창사 이래 최고 매출액을 달성하기도 했다.
"제습기 보급률이 급성장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홈쇼핑 덕분이에요. 주부들이 제습기라는 제품을 전혀 몰랐다가 1시간 동안 자세히 제습기에 대해 설명해주니까 구입에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제습기를 구입해 사용해본 주부들이 놀라 '입 소문'을 내주면서 제품 인지도도 덩달아 높아진 것이죠."
위닉스의 국내 가정용 시장점유율은 절반 이상인 60%에 가깝다. 글로벌 기업인 LG전자는 약 30% 안팎으로 집계되고 있다. 위닉스의 제습기는 열교환 시스템의 자체생산 설비를 이용한 '40년 노하우'의 결정체로 가장 큰 경쟁력이 가격이다. 또 유일하게 한국천식알레르기협회로부터 인증을 받은 제습기로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는데 어렵지 않았다.
◆ "'제습기 1번지'는 하루 아침에 이뤄진 일이 아니다"…제습기 보급률 불과 10%대
위닉스는 지난해 매출액1920억원에 40억원 가까운 영업이익을 올렸다. 올해 매출은 지난해보다 최소 50% 이상 늘어나 3000억원을 웃돌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40~50만대 팔린 제습기도 세 배 정도 불어난 140~150만대 보급이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다.
"위닉스 제습기는 하루 아침에 판매 1위 제품으로 떠오른 것이 아니에요. 이미 5년 전에 미국으로 수출해 인정받고 선진시장에서 소비자만족도 1등을 차지한 제품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덕분에 중소기업이면서도 명실공히 국내에서도 1등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위닉스는 2008년부터 미국 SEARS 백화점의 자체 가전 브랜드(PB)인 'Kenmore'에 OEM(주문자가 요구하는 제품과 상표명으로 완제품을 생산) 방식으로 수출하고 있다. 2011년 미국 컨슈머리포트에서 위닉스의 3개 모델이 평가 대상으로 뽑혔고 이 모델들은 Large capacity 부문 1위, Small Capacity 부문 1위, medium Capacity 부문 2위로 평가받아 세계 최고의 제품으로 인정받았다. 비영리기관인 소비자협회에서 내놓은 컨슈머리포트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소비자 정보 관련 보고서다.
"현재 중국과 태국에 제조법인이 있는데 태국 제2공장은 일본 가전업체들의 주문 쇄도로 세운 것입니다. 냉장고용 열교환기는 이미 20년 전부터 일본으로 역수출하고 있죠. 이젠 미국과 일본을 넘어서 유럽시장에서 더 활발한 영업활동을 펼쳐볼 생각입니다."
위닉스는 2005년 공기청정기로 첫 미국 시장에 발을 내디뎠고 2008년엔 제습기 40만대 수출 주문을 따내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10년 7000만불 수출탑을 수상한데 이어 한국수출입은행이 발표한 '한국형 히든챔피언' 육성대상기업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위닉스는 이로써 해외 진출 시 3% 가량의 금리인하 혜택을 누렸다.
"제습기로 유명해졌지만 위닉스는 가전부품을 시작으로 40여년 동안 공기청정기 온풍기 정수기 냉온수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완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있는 곳입니다. 특히 제습기 하나만 놓고 봐도 일본의 보급률은 90%에 육박해요. 반면 국내의 경우 올해 성장을 감안해도 약 12~13%에 불과합니다. 향후 2~3년간 가파른 성장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입니다."
제습기로 홈런을 날린 위닉스는 '물없는 가습기'로 또한번 승부수를 띄울 계획이다. 물없는 가습기로 널리 알려진 '에어워셔'로 연타석 홈럼을 노리겠다는 것. 여름계절가전인 제습기에 이어 겨울용가전 가습기로 사업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위닉스가 개발한 가습기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가습기의 세균 번식 위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술에 주안점을 뒀다. 물이 필요없는 기술을 이용해 소비자들의 불안을 잠재우면서도 가습 성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고안된게 특징이다. 그동안 장벽이 됐던 가격도 대폭 낮춰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계획이다.
제습기가 소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여름계절가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비수기 실적 균형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단점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회사 측은 내다보고 있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을 경영철학으로 삼고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윤 회장은 500여명의 위닉스 직원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한 회사의 오너든 최고경영자든 두 분류로 나눠진다고 봐요. '나쁜 사장'과 '좋은 사장'이죠. 직원들에게 최소한 나쁜 사장이 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 나갈 겁니다."
한경닷컴 글=정현영 기자 jhy@hankyung.com 사진=변성현 기자 byun8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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