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치기식 대기업 사정(司正) 한파가 거셌던 것 같다. 국세청은 이례적으로 세무조사를 덜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위축된 기업인들의 심리가 그만큼 심각했다는 방증이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일감 몰아주기 과세 요건을 완화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 관련법안들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고 기업 활동을 옥죄는 추가적인 과잉 법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투자하는 기업을 업어주고 싶다”고도 했다.
하지만 한껏 자라난 ‘불신의 씨앗’은 그렇게 쉽게 수습되지 않는다. ‘복지’가 화두가 된 세상에서는 증세 또는 국세청의 노력세수가 불가피할 것이란 인식이 똬리를 튼다. “법대로 추징할 테니 억울하면 불복절차를 밟아라”는 세무 공무원들의 말은 기업인들의 머릿속 깊숙이 각인됐다.
'만악의 근원'이 된 기업인
대통령 선거 정국에서 경제민주화 좌판이 쫙 깔린 데 이어 ‘갑을논쟁’이 벌어지면서 대기업 총수는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됐다. 정치적 이해에 포퓰리즘이 버무려진 각종 입법이 총수를 겨냥했다. ‘증여의제’로 세금을 걷는 일감 몰아주기 과세가 그렇게 도입됐다. 입법과정에서 기업인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국회의원들은 징벌적 법안을 쏟아내면서 선명성 경쟁을 했다. 정부는 기업지배구조를 뒤흔드는 상법 개정안을 선뜻 입법 예고했다. 온 세상이 대기업 총수를 옥죄고 있다는 얘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게 법 지배의 고유 취지라는 인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은 애초 이기적이지만, 이를 조절해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따위는 여야 어느 곳에서도 반향을 얻지 못한다.
편법 대물림과 협력업체 쥐어짜기 시비로 정권교체기 혹은 경제위기 때마다 ‘속죄양’이 되곤 하는 게 기업인의 운명이라지만, 요즘 느끼는 위기감은 여느 때와는 다르다. ‘자유기업제도’의 근간이 흔들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비 온 뒤 죽순처럼 고개를 들고 있다. 국가 규제와 개입을 최소화하고, 소비자를 위한 개방적인 경쟁을 허용하는 게 자유기업제도이고 시장경제다. 정권 초 사정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시장경제가 굳건할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런 믿음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시장 경제'에 대한 믿음 퇴조
누군가가 시장에 만연한 ‘불신’을 없애지 않으면 경제 효율이 높아지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기업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정책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몇 마디 수사(修辭)로 얼어붙은 기업인의 심리를 달랠 수는 없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 정책당국자는 기업의 도움 없이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업인을 파트너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 부총리는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자신을 난도질한 의회 지도자들을 찾아가 “파트너(기업)가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지 못하면 경제가 더 어려워진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입법활동이 시급하다고 역설해야 한다. 수요창출형 단기 경제부양과 장기 체질 개선을 가져올 수 있는 공급 측면 정책을 어떻게 가져갈지보다 더 급한 게 시장에 쌓인 불신을 해소하는 일이다. 시장은 (기업인을 한사코 불신하는) 입법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정무형 경제부총리를 원하고 있다.
이익원 산업부장 ik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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