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기획재정부가 되살려 낸 '갑을'

입력 2013-08-11 17:17   수정 2013-08-1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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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동 생활경제부 기자 jdpower@hankyung.com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달라진 것 중 하나가 ‘갑을 표현의 폐지’다. 지난 5월부터 국회사무처 등 입법부, 국방부 등 중앙정부 부처, 인천시 등 지방자치단체가 ‘갑을 관계’라는 문구 자체를 계약서에 쓰지 않기로 했다.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막말 파문이 겹치면서 정부가 앞장서 왜곡된 우열체계를 바꿔보고자 한 것이다.

정부의 솔선수범은 호응을 얻었다. 국민 대다수가 지지했고 현대백화점 등 유통업계의 동참도 이끌어냈다. ‘갑을’이란 표현을 당장 없애기 힘든 곳에서도 납품업체 하도급업체 등 약자를 더 많이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 가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상생 무드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최근 생겼다. 우유 업체들의 가격 인상 움직임에 정부가 끼어들면서 벌어진 일이다. 자세한 사정은 이렇다. 서울우유 등 우유 업체들은 지난달 중순 이후 어쩔 수 없이 우유 가격을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방침대로 올해부터 우윳값을 결정할 때 원유(原乳) 가격의 등락을 반영하기로 했는데, 그간 원유 가격이 뛰어 우윳값을 올려야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물가를 담당하고 있는 기획재정부가 지난달 말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 관계자들을 불러 우유 판매가격 인상 억제를 당부했다. 서울우유 등은 정부의 ‘액션’에도 인상 불가피성을 호소하며 예정대로 지난 8일 가격을 올리려 했다. 정부의 ‘기술’은 이때부터 발휘됐다. 당장 농림축산식품부의 ‘을’인 농협을 시켜 산하 유통업체인 하나로마트에선 우유를 예전 가격 그대로 팔도록 했다. 하나로마트는 정부엔 ‘을’이지만, 서울우유 등 우유업체에는 ‘갑’인 만큼 우유업체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은 최저가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이다 보니 하나로마트와 마찬가지로 우윳값 동결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격을 못 올려 발생하는 부담은 물론 우유업체가 지게 된다.

정부로선 ‘발등의 불’은 껐다. 하지만 지속될 수는 없다. 기재부도 잘 알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인상도 억제하지 못하고 ‘갑을 관계’만 이용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이라도 경쟁을 통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가격을 결정토록 하는 게 옳다. 이번 기재부의 기술은 구태의연한 ‘갑의 기술’에 불과하다.

박준동 생활경제부 기자 jdpow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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