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금융실명제 작업을 한 아파트가 204호였나? 304호였나?”
“아마 204호였을 겁니다. 505동 204호요.”
국내 금융사의 큰 획을 그은 금융실명제를 도입한 주역들이 제도가 실시된 지 정확히 20년 만인 12일 서울 여의도의 한 중식당에 모였다. 참석 인원은 7명. 홍재형 당시 재무부 장관(전 국회 부의장), 김진표 당시 세제심의관(현 민주당 의원), 진동수 당시 재무부 과장(전 금융위원장), 최규연 당시 사무관(현 저축은행중앙회장), 백운찬 당시 사무관(현 관세청장), 양수길 당시 부총리 자문관(현 KDI 초빙교수), 김준일 당시 KDI 박사(현 한국은행 부총재보) 등이다. 기밀 유지를 위해 과천청사가 아닌 근처 아파트까지 빌려 작업했던 패기 가득찬 사무관·과장들은 어느새 주요 경제부처 요직에 올랐다. 당시 일을 주도했던 국장과 장관은 정·관계 원로가 됐다.
이날 모인 금융실명제 주역들은 당시의 ‘비밀 작업’을 떠올리며 웃음꽃을 피웠다. 특히 직속 상사와 동료들 몰래 일해야 했던 고충이 가장 컸다고 털어놨다. 홍 전 부의장은 “진동수가 당시 과장이었는데 (금융실명제 준비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던) 임창열 당시 차관보(전 경제부총리)가 자꾸 다른 일을 시켜서 진동수가 나한테 하소연했다”고 회상했다. 진 전 위원장 또한 “엄청 난처했다”며 “당시 사무관들은 해외출장을 핑계로 자리에서 떠나 있을 수 있었지만 과장들은 아파트와 사무실을 오가며 일했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금융실명제 도입이 금융거래 선진화에 기여했다는 점에 대한 자긍심도 내비쳤다. 김 의원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검은 정치자금을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만든 금융실명제 덕분이었다”고 자평했다.홍 전 부의장은 “금융실명제 도입 당시에도 차명거래까지 금지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며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금융거래 제재는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차명거래는 금지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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