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 저질 토크쇼·검증 안된 건강 프로 '홍수'
KBS·EBS·아리랑TV 통합 방안 검토해야
YTN, 정부가 고삐 쥐고 있을 이유 없다
만난 사람 = 최명수 문화부장
“한국 방송계는 역대 정권의 잘못된 정책 등으로 인해 ‘난개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모든 문제점과 과제를 꺼내 놓고 원점부터 재검토해야 합니다.”
김우룡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3일 방송의날 50주년을 맞아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방송계 현실에 대해 “한마디로 위기”라며 “리셋(reset)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69년 MBC 공채 1기로 입사해 16년간 프로듀서(PD)로 일하다 1985년 학계로 옮겨 방송학자의 길을 걸었다. 방송위원회 위원,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및 이사장, 국회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지난달에는 방송통신위원회 정책 자문기구인 ‘방송통신 정책고객 대표자 회의’ 의장에 선임됐다. 방송 현업과 이론 및 교육, 경영과 정책 등을 두루 경험한 ‘방송계의 산증인’인 그를 서울 여의도 KBS온(옛 KBS견학홀)에서 만나 한국 방송계의 문제점과 과제, 각종 현안에 대한 해법과 개선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방송의 날’ 50주년을 맞았습니다. 현재 한국 방송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초고화질(UHD) 방송이 도입될 만큼 방송 기술과 기기 등 하드웨어는 최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프로그램 내용과 제도, 교육, 정신 등 소프트웨어는 기술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이 심화하고 있습니다. 위성 케이블 인터넷 등 온갖 신기술 방송의 전시장처럼 돼 버렸는데 경쟁만 치열해졌을 뿐 콘텐츠 질은 날로 저하되고 있습니다. 출범부터 문제가 많았던 종합편성채널은 방송을 ‘광막한 황무지’로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어요.”
▷이렇게 난맥상을 보이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요.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의 실종을 들 수 있죠. 역대 정권을 보면 재임 중에 한 건 하려는 ‘단기 업적 주의’가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뭐가 좋다고 하면 면밀한 검토 없이 다 들여오고 그러니 정책의 줄기가 없었죠. 즉흥적으로 도입했다가 실패한 것도 많았어요. 1970년대 기구송신방식인 티콤(TCOM)이나 최근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이 대표적인 사례죠.
보다 중요한 원인은 정치 풍향에 따라 방송계가 춤춰 왔다는 것이죠. 국민행복시대를 열기 위해 고민해야 할 방송계의 여러 문제가 정치적 진영논리와 공공성 이데올로기에 휘둘려 왔습니다. KBS 수신료 인상 문제가 좋은 예입니다. 노무현 정부 때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반대로, 이명박 정부에선 민주당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죠.”
▷KBS 수신료 인상이 쟁점으로 떠올랐는데요.
“수신료는 3년에 걸쳐 현실화하되 이에 비례해서 광고를 축소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국가기간방송인 KBS는 광고가 없는 ‘청정 방송’이 돼야 합니다. 상업 광고를 내고 있는 한 공영성은 제고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KBS 광고가 없어지면 그만큼의 물량이 종편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광고주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요. 종편 시청률은 1% 수준입니다. 시장 논리로 볼 때 MBC SBS 등 지상파가 가장 큰 반사이익을 보고, 종편 등 케이블 채널과 신문 순으로 혜택을 보겠죠.”
▷종편 출범이 방송계에 미친 영향은.
“지상파 3사에 큰 자극제가 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3사의 ‘뉴스 독점’과 ‘스포츠 중계 독점’이 무너졌죠. 뉴스 진행 스타일의 변화도 가져왔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 측면이 훨씬 많습니다. 콘텐츠의 저질화가 가장 심각합니다. 싸구려 정치 토크쇼를 유행시켜 정치평론가들을 양산하고, 가십·스캔들·수다·뒷담화를 상품화하고, 무책임한 사이비 의학·건강 정보가 넘쳐납니다.
무차별적으로 방송되는 건강 의학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으면 암 등 불치병은 모두 나을 수 있고 백세 건강이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것 같습니다. ‘고수’ ‘준전문가’ 등이 등장해 국민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프로그램은 앞머리에 ‘일부 내용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고 고지하고서는 시청자가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엉터리 정보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시청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준 측면은 없나요.
“지상파와 비교하면 선택의 폭을 확장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종편 4사 간에는 차별화가 별로 없습니다. 인기 프로그램을 모방하는 것은 편성의 오랜 전략이자 관행으로 볼 수 있지만 정도가 심합니다. ‘닥터의 승부’가 히트하면 ‘닥터콘서트’가 나오고 ‘시월드’가 인기 있으면 ‘고부스캔들’이 나타나는 식이죠. 채널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다양한 프로그램이 늘어날 것 같지만 실제로는 ‘풍요 속의 빈곤’ ‘다양성 속의 획일화’ 현상으로 닮은꼴 프로그램이 양산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시청자는 혼란스럽죠.”
▷방통위는 최근 승인조건을 위반한 종편에 시정명령을 내렸습니다. 콘텐츠 투자 계획을 이행하지 않고 재방송 비율을 지키지 않아서인데요.
“글로벌 미디어를 키우겠다고 야심 차게 추진한 MB정부의 방송정책이 종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채널의 충실도와 브랜드 가치는 하루아침에 올라가지 않죠. 많은 특혜를 받았지만 시청률에 한계가 있고, 광고 수입이 적으니 제작비를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승인 조건을 못 지킨 것은 예견된 일이었죠. 재방송 비율이 높다는 것보다 마구잡이식 출연자 기용이 더 문제입니다. 시청률만 높일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죠.
콘텐츠 투자를 하지 않고, 재방송만 많이 낸다고 방통위가 영업정지 명령까지는 내리지 못할 겁니다. 다만 재승인 심사에 적극 반영해야 합니다. 일부 종편을 퇴출시키더라도 시장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2009년 종편 신설의 근거가 된 미디어법 개정에 참여하셨는데요.
“미디어법 개정의 토대는 제가 공동 위원장을 맡은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의 보고서입니다. 저는 보고서에 ‘종편의 의무 송신(must carry) 규정은 향후 폐지토록 한다’고 명시했어요. 종합유선방송사업자들이 종편을 반드시 송신해야 한다는 규정은 초기에 콘텐츠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필요하지만 이후에는 없애는 게 맞습니다. 이번 재승인에는 폐지 기한을 명시한 ‘일몰제’를 부관(附款·법률 행위에 덧붙이는 조건·기한 따위의 제한) 조항으로 넣어야 합니다. 앞으로 3년 뒤에는 종편의 허가가 무의미해질 수 있습니다. 콘텐츠 진흥을 유도하고 글로벌 미디어 출현을 위해서는 새로운 사업자의 시장 진입을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종편 특혜는 ‘동일 서비스 동일 규제’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시급히 개선해야 할 방송 정책적 과제들이 있다면.
“역대 정권에서 잘못 만든 규제와 법, 정책들을 뜯어고쳐야 합니다. 노무현 정부 때 케이블 채널의 보도 부편성을 금지한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정부 허가를 받은 한국정책방송(KTV)과 아리랑TV 국회방송 OUN만 편성의 20%를 뉴스 프로그램으로 채울 수 있고, 나머지 채널은 보도국이나 기자라는 명칭조차 못 쓰게 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 허가를 받아 뉴스를 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보도 채널도 향후 적정 시점에서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어야 합니다.
KTV 국회방송 TV서울 청소년방송 사이언스 국군방송 등 세금 쓰는 관변 미디어가 난립한 난맥상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민영 미디어가 넘치는 현실에서 관변 미디어가 이렇게 많이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YTN도 정부가 고삐를 쥐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방통위는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역대 정권에서 만들어진 각종 규제를 재검토하고 방송계의 문제점과 과제들을 다 끄집어 낸 후 순서대로 토론하고 조사하고 연구해 한국 방송의 재도약을 위한 보고서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정책이 순차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국회에서 방송공정성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데요.
“KBS MBC 등의 경영진 선임 방식을 바꾸자는 것인데요. 문제는 선임 방식보다는 적임자를 뽑지 않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캠프 사람이나 측근을 경영진으로 보내지 말고 방송에 공헌할 수 있는 인물을 보내면 됩니다. 추천을 받은 곳이 야당이든 여당이든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지만 KBS이사회만 보더라도 여당 간사와 야당 간사가 있어 여야 대리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지배구조 문제는 제도보다는 사람입니다.”
▷공영방송인 KBS와 MBC의 위상은 어떻게 재정립돼야 할까요.
“영국 BBC나 일본 NHK나 국가기간방송의 중요한 역할은 국제 방송과 교육 방송입니다. 국제방송과 교육방송 수준 향상을 위해 KBS와 EBS, 아리랑TV 등을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합니다. MBC는 지방 17개사를 지역 사회에 매각하고 대금 일부로 정수장학회 지분(30%)을 인수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후 지분의 60%를 일정 소득 이하의 국민에게 넘기는 ‘국민개주제’를 통해 ‘공영적 민영방송’ 체제를 갖추고 책임 경영을 확립해야 합니다.”
김우룡 명예교수는 'PD 출신 보수 언론학자'
김우룡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70)는 국내 대표적 보수 성향 언론학자로 꼽힌다. 서울 중앙고와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신문대학원과 미국 컬럼비아대 신문대학원을 거쳐 고려대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땄다. 1969년 MBC TV 공채 1기 프로듀서로 입사해 ‘장학퀴즈’ 등을 만들었고 영화부장과 편성기획부장 등을 지냈다. 1985년 대학교수로 전직해 한국외대 정책과학대학원장, 언론정보연구소장 등을 맡았다. 1992~1993년 한국방송학회장을 지냈다. 미디어비평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추천으로 방송통신위원회의 전신인 방송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뉴라이트 계열 언론단체인 공정언론시민연대에 참여해 공동 대표로 활동했고, 국회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았다.
2009월 8월 MBC 최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에 올랐으나 이듬해 3월 ‘큰집 조인트’와 ‘좌파 대청소’ 발언 파장으로 물러났다.《TV프로듀서》《방송학강의》《방송광고론》《뉴미디어개론》등 20여권을 저술했다.
정리=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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