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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주(新稻酒)'…그 해 첫 수확한 쌀로 빚은 술이 최고
우리 술 문화…조선 시대 유교 영향으로 '활짝',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사라져
민족 대명절인 추석을 맞아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전통 차례주(酒)다. 이 차례주는 조상께 '음복(飮福)'을 빌기 위해 사용될 뿐만 아니라 오랜 만에 만난 가족 친지들과 함께 '음복례'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음복'이란 복을 마신다는 뜻으로, 조상의 음덕을 입어 자손들이 잘 살게 해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의 '우리 술 말살 정책' 이후 각 가정에서 차례주를 직접 빚던 풍습은 지금 대부분 맥이 끊겼다. 각 가문마다 대대로 내려오던 다양한 차례주 형태 역시 모습을 감춘 상황. 옛 선조들이 조상께 음복을 빌기 위해 썼던 차례주는 전통 방식으로 빚은 100% 순수 발효주였다. 주정(소주 원액)을 희석해 만든 일본식 청주는 사실상 전통 차례주로 불릴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 술 제조기업인 국순당은 최근 전통 차례주 빚는 행사를 잇따라 열고 전통 차례주 널리 알리기에 적극 나섰다. 기자도 행사 전 과정에 참여해 전통 차례주를 빚는 생생한 현장을 체험해 봤다.
국순당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전통 차례주 제조법을 배우고 나면 정종과 같이 흔히 알려져 있는 일본식 청주를 차례상에 올리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신도주(新稻酒)'…그 해 첫 수확한 쌀로 빚은 술
전통 차례주는 일제 강점기 이전 그 종류만 해도 수백 가지였다. 각 가정마다 빚는 재료와 담금 방법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우리 조상들은 그 해 첫 수확한 쌀로 만든 신도주를 최고로 쳤다. 신도주를 빚는 방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우선 재료는 햅쌀(1.5kg), 물(2.25ℓ), 전통 누룩(150g), 밀가루(15g), 항아리(5ℓ), 찜 솥, 증자포(광목천), 체 등이고 발효용 항아리가 필요하다. 이 항아리는 세균에 오염되지 않도록 소독 및 살균이 필요하고 흰무리떡(백설기)과 고두밥이 마지막 재료다.
신도주를 빚는 첫 단계는 잘게 뜯은 백설기에 물 700㎖를 붓고 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풀어야 한다. 이후 누룩과 밀가루를 섞어 항아리에 넣고 남은 물 300㎖도 항아리에 붓고 섞어 준다. 담금 후 입구를 비닐 또는 천으로 덮고 고무줄로 고정시킨다. 이때 발효 적정 온도는 25~27도가 적당하다.
두 번째 단계는 1단계 담금 3일 후 고두밥을 준비해 차게 식히는 것부터 시작이다. 1단계 담금 했던 술덧에 차게 식힌 고두밥 1kg과 물 1.25ℓ를 항아리에 넣고 혼합한 뒤 다시 입구를 비닐 혹은 천으로 덮고 고무줄로 막는다. 역시 발효 적정 온도는 25~27도다. 2단계가 끝난 뒤 발효가 종료될 때까지 하루에 한 번씩 국자로 저어준다. 발효가 왕성해지면 공기방울이 올라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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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발효와 거르기 단계만 거치면 신도주를 구경할 수 있다. 2단계 담금 후 약 10일이 지나면 공기방울도 올라오지 않고 술 윗부분에 맑은 층이 분리된다. 이 상태가 되면 발효가 종료된 것이다. 발효 온도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 알코올 16% 내외의 술이 만들어진다.
이후 발효가 종료된 술덧을 광목천 주머니에 넣고 맑은 술이 떨어지도록 한다. 체로 술 지게미를 제거한 후 탁한 술을 냉장고에 넣고 가라앉혀 맑은 윗물을 따라내면 되는 것이다. 탁한 술은 동량의 물을 섞어 막걸리로 음용할 수도 있다.
◆ 간단한 '우리 전통술 史'…조서 시대에 '피고' 일제 치하에 '지다'
전통주의 전성기는 조선 시대다. 가양주(가정에서 직접 빚은 술) 문화가 발달해 지방별로 뚜렷한 특색을 보였다. 원료와 제법도 고급화돼 중앙 주류가 발달한 시기였다. 양조 원료도 멥쌀 일색에서 찹쌀로의 전환이 나타났다.
가양주와 지방명주의 발전은 유교의 영향력과 맥을 같이 한다. 유교 성숙기였던 조선 시대에 사림(士林)의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종가 중심의 차별화된 주류 문화가 퍼졌다. 또 생산기술 발달로 지역별 특화작물 중심의 지방명주도 등장했다.
조선 시대에 유명했던 술은 무려 300여 가지에 이르나 그 중에서도 백하주, 삼해주, 이화주, 청감주 등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당시 소주도 날로 소비가 늘어 실학자 정약용이 "전국의 소주 고리를 거둬 식량난을 예방해야 한다"고 상소를 할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 때 '양조면허제도'가 시행되면서 가양주 문화를 억압했던 탓에 조선 시대 화려했던 우리 술 문화는 맥이 끊겼다. 600여 종에 달했던 가양주들은 현재 몇 가지만 전승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1907년 일제는 세금을 거둬들일 목적으로 술 제조 면허제를 전면적으로 시행하고 주세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밀주를 방지하고자 자가 양조를 금지시켰다.
제조 방법도 획일화했다. 소주, 청주(약주), 탁주 등 일제가 지정한 제조방식만 인정했다. 각 가문마다 다양한 담금 방법을 택했던 가양주와 지방명주들은 이 당시 대부분 사라졌다.
해방 이후 일시적으로 가양주 제조가 성행했지만, 전통 발효주보단 개량식 막걸리 위주로 생산되면서 조선 시대의 전통을 이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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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 때인 1970년대에 전국적인 쌀 부족으로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희석식 소주가 대량생산됐다. 쌀을 대신한 '밀가루 막걸리'가 양산되던 시기도 바로 이 때다. 정부에선 다시 대대적인 가양주 단속에 들어갔다.
1980년대 들어와 정부는 술 제조에 쌀을 다시 사용하도록 허가했다. 일부 전통주를 복원하고 제조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도 이 시기다.
한경닷컴 노정동 기자 dong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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