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번호 없어 온라인으로 영화예매도 못해
영문 웹사이트 내용 부실…가입절차도 까다로워
영어이름 인식 어렵고 해외카드로 결제 안돼
국내 영어학원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하는 엘리자베스 딜런 씨(39)는 지난 추석 연휴 온라인으로 치킨을 주문하려다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유명 치킨 배달업체인 P업체 웹사이트에 접속했으나 회원가입 첫 단계인 이름 입력부터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 영문으로 이름을 써넣자 ‘이름을 올바른 한글로 작성해 달라’는 메시지가 떴다. 이후 나타난 페이지에도 아이디 주소 생년월일 등 복잡한 정보를 한글로 기재하게 돼 있었다.
딜런 씨는 “한글 웹사이트가 어려워 영문 웹사이트로 들어가니 아예 회원가입이나 로그인 버튼이 사라지고 회사 소개나 가맹점 개설 정보만 떠서 황당했다”며 “빠르고 편하다고 해서 인터넷을 이용하려 했는데 앞으로도 계속 전화 주문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외국인 이름·등록번호 인식 못해
전국 어디서나 인터넷이 연결되고 PC와 모바일 기기를 이용해 다양한 전자상거래를 할 수 있는 ‘정보기술(IT) 강국’ 한국은 국내 거주 외국인들에게는 허상이다. 언어 장벽에 본인 인증·전자상거래 절차 등이 개선되고 있지 않아서다.
연세대에 다니는 유학생 구아시드 조안나 씨(20)는 “한국 주요 업체들조차 영문 서비스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포털업체나 유명 방송사 등이 영문으로 된 글로벌 홈페이지를 운영하지만 한국 웹사이트와 내용이 다르다”며 “영문 웹사이트는 내용이 부실해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으면 무용지물”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산하 국제정책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인 안드레 카스파 와르켄 씨(27)는 “그나마 영문 웹사이트가 있으면 낫다”며 “한국 웹사이트만 볼 수 있는데 안내문이 그림 파일로 돼 있으면 번역 프로그램도 돌릴 수 없어 난감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개정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지난해 8월부터 인터넷 사이트에서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제한하면서 가입 시 본인 인증을 요구하는 사이트는 대폭 줄어들었다. 하지만 전자상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본인 확인 절차가 필요한데 이 단계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아 국내 거주 외국인들은 진땀을 뺀다. 유학생 킨들 페인 씨(20)는 “긴 이름이나 영문 이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 축에도 끼지 않는다”며 “외국인등록번호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트가 많아 외국인 회원가입 절차가 없는 사이트는 회원가입 자체를 꺼리게 된다”고 했다.
쇼핑을 좋아한다는 니나 라일리 씨(29)는 “한국에서 이름난 여성쇼핑몰 B업체의 웹사이트에 회원가입하러 들어갔더니 외국인등록번호뿐 아니라 국제운전면허번호까지 요구했다”며 “차를 몰지 않는 나는 한국에서 쇼핑도 하지 말라는 뜻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해외 발급 신용카드도 무용지물
무엇보다 국내 거주 외국인이 인터넷을 이용할 때 불편을 느끼는 점은 해외에서 발급된 카드를 쓸 수 없다는 점이다. 비자 마스타 등 국제브랜드 카드도 그렇다. 루이자 스펜서 씨(31)는 “한국 유명 쇼핑몰을 이용할 때 본국에서 만든 카드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며 “특히 해외 카드가 되는 일부 쇼핑몰은 배송지가 외국에 있어야만 한다는 규정을 둬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박소영 페이게이트 대표는 “신용카드로 온라인에서 물건을 사려면 액티브X를 통해 결제프로그램인 ISP안전결제·안심클릭 등을 내려받아야 하는 것이 국내 쇼핑몰의 기본 시스템”이라며 “외국에서 발급한 카드는 원천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아마존 등 해외 사이트에 국내 신용카드를 등록해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박 대표는 “전자상거래가 낙후된 것도 아니면서 국내 거주 외국인들이 돈을 쓸 수 있는 창구를 아예 막아버리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국내에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145만명에 달한다. 중국인 남편을 둔 이지연 씨(가명·29)는 “외국인도 편하게 온라인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외국인등록번호를 인식하고, 해외 신용카드도 받도록 국내 웹사이트가 대대적으로 개선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보영 기자 w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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