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K씨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산시장의 움직임을 짐짓 모른 척하며 혼자서 성인군자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는 속으로 정치개혁의 열망이 자본소득의 욕망에 패배했음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확실히 두 번째 자각이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그는 ‘중산층 소비자’에서 ‘참여하는 시민’으로 깨어났고, 집권 후반기에는 다시 ‘자산 투자자’로 깨어났다. 시세 차익을 추구하는 자산시장의 ‘플레이어’가 ‘시민’이라는 백일몽에서 깨어난 그가 새롭게 맡아야 할 배역이었다. 2007년, K씨는 자신이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길 빌면서 유명 건설사들의 모델하우스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게임》에 등장하는 1955년생 베이비부머 K씨의 인생 단막이다. 2000년대 중반의 아파트 폭등을 경험하면서 정치적 시민에서 자산 투자자로 변해가는 그의 모습은 부동산 문제와 얽힌 한국 중산층의 행로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은 한국 부동산 경제에 관한 논픽션이 아니다. 부동산을 중심으로 쓴 사회비평적 픽션이다. 저자는 부동산, 특히 아파트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가상의 행위자를 신문, 논문, 소설 등 다양한 자료로 조직한 상황에 밀어넣은 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관찰하는 서술 방식을 택한다. 덕분에 독자들은 잘 만든 TV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부동산과 얽힌 각 세대의 문화 및 정치·사회적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다.
참여정부의 당위성에 대한 ‘시민적’ 믿음으로 부동산과 거리를 두던 K씨는 정부가 오히려 ‘버블’을 키웠다는 배신감을 느끼며 뒤늦게 용인의 한 아파트를 샀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파른 내리막길. 1년 뒤 금융위기가 일어났고 은행 이자를 갚기에 바빴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언론은 ‘하우스푸어’로 명명했다.
K씨와 다른 길을 간 사람의 역사도 물론 있다. K씨와 달리 그는 대학 때 이미 사회에 대한 믿음을 버렸고, 혼자 세상을 헤쳐나갈 방법으로 부동산에 눈을 떴다. 1993년 봄 그는 운 좋게도 수도권 남쪽 신도시의 32평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평당 분양가는 180만원대. 분양권이 당첨된 날 그의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후 중산층의 삶에 익숙해졌고,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 덕분에 외환위기의 구조조정도 피할 수 있었다.
구조조정의 한파가 지나자 그는 ‘바이 코리아’ 열풍을 타고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목돈을 벌었고, 주가 상승이 곧 아파트값 상승으로 이어질 거라는 신문의 조언을 믿고 대지 지분이 큰 반포의 재건축 단지를 매입했다. 2008년 재건축된 단지의 평당 분양가는 3000만원대를 간단히 넘겼다. 그는 이제 정치와 거리를 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계층이 됐다. 그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이미 실현했기 때문에 구태여 정치적 대변인을 찾아 나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계층”이었고, 저출산으로 미래가 불투명한 한국 사회가 아닌 곳으로 아이를 유학 보낼 수 있는 계층이었다.
저자가 말하는 또 하나의 한국 부동산의 흐름은 방 한 칸을 상징하는 ‘큐브’다. 1960년대 대학가의 하숙집과 1970년대 공단 근처의 벌집, 1990년대부터 그 뒤를 이은 고시원까지. 그리고 일상화된 저임금·저출산·고분양가에 따라 집 대신 방에서 살아야 하는 미래의 큐브시대 전면화 현상까지의 흐름이다.
집값이 떨어져야 한다거나 올라야 한다는 당위적 관점, 혹은 저자의 정치적 입장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현상을 담담히 짚는 것도 몰입도를 높이는 이 책의 장점이다. 책을 덮으면 환희와 절망을 좌우한 한국 부동산 역사에 씁쓸한 뒷맛이 들지 않을 수 없지만, 밀도 있는 내용을 다시 곱씹어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디자인 연구가인 저자의 아파트에 관한 두 번째 저서다. “20세기 디자인의 역사는 사실상 중산층의 역사이고, 한국 중산층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아파트의 역사”라는 게 저자가 아파트 관련 책을 쓰게 된 계기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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