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기초연금의 도덕철학적 문제

입력 2013-09-30 17:43   수정 2013-09-30 22:35

자비를 권리로 선언한 가치 전도
국민연금은 저축 아닌 세대 부조
30만원, 50만원 인상경쟁 불 보듯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이타심이 실은 이기심의 진화적 전략에 불과하다는 폭로는 진실 여부를 떠나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물론 이 불편한 기분은 ‘진화’라는 단어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진화는 누구의 설계나 계획이 아닌, 오랜 적응의 결과다. 그것은 우주적 시간에 드러나는 것이어서 개체는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 자본주의 4.0 같은 주장은 진화와 계획을 혼동한 무지한 발상이다. 진화를 바르게 이해할 때라야만 우리는 이타심의 덕목들을 저급한 이기심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 이기심의 해설자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을 쓰고 시장경제 체제의 가장 강력한 호교론자인 이마누엘 칸트가 인간 내면의 보편적 도덕심을 강조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기적 계산 속에 따라 이타적 행동을 꾸며내는 경우가 더 많다. 정치는 더욱 그렇다. 대부분의 정치언어는 거짓말의 반죽에 가깝고 위선적이다. 복지국가라는 개념은 그런 정치 언어의 백미다.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법칙에서 종종 주권자로 선언되는 국민이나 대중도 예외는 아니다. 독재자만큼이나 대중도 필연적으로 타락한다. 주권자가 노예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복지를 자비 아닌 권리로 선언하는 바로 그 때가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공짜 밥을 얻어먹거나 한 달에 20만원씩 용돈을 받는 것을 나의 권리라고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노예들에게 울려퍼진 해방의 찬가다. 20세기 중우(衆愚)정치는 그렇게 국민을 공공연히 노예와 거지로 전락시킨다. 눈물 젖은 빵은 자유인의 출발이지만 정치는 이를 교묘하게 뒤섞어 놓는 방법으로 자유를 훼손한다. 기초연금이니 기초노령연금 따위는 이타적 언어로 외양을 꾸미고 있지만 실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악의 속성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구걸을 권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위 70%라는 단어가 갖는 허구성도 그렇다. 70%는 언어 자체로 대다수를 뜻하는 범주어다. 대다수 사람을 ‘하위’라고 범주화하는 것은 강탈을 자비심으로 바꿔치기하기 위한 언어의 포장술이다. 하위 10%, 하위 20%는 말이 되지만 하위 70%라니! 더구나 그 70%가 세금은 더 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4000만원 급여소득자가 한 달에 1만원씩 더 내자는 세법 개정안은 지난 8월 깨끗이 거부되고 말았다. 지금 새삼 증세를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로부터 얼마를 더 받아내자는 것인지.

복지가 시혜 아닌 권리로 선언된 것은 2차대전 직후다. 종종 시민적 권리라는 말을 쓰는 것은 받는 자의 자존심을 위한 허망한 노력이다. 만일 기초연금과 부자증세의 결합을 나의 권리라고 선언한다면 이는 타인을 강탈하는 것을 나의 권리로 선언하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이 지지한다고 선악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도시에 의인 10명이 없을 수도 있다. 이타심과 권리를 혼동한다면 이는 도덕의 무정부 상태를 말할 뿐이다. 말도 많은 국민연금 연계는 실은 너무도 당연하다. 국민연금의 원리는 기초연금과 다를 것이 없다. 시민들이 국민연금을 개인저축이나 퇴직연금처럼 생각하는 것은 정부가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혼동이요 오해다. 진영 장관이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별개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지 궁금하다. 연금 가입자들은 연금공단에 있는 ‘내 돈’과 정부가 주는 ‘공짜’를 구분하고 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국민연금이 저축 아닌 사회적 부조라는 사실을 실토하는 것이 어떨는지.

우리는 각자의 양심이 인도하는 바에 따라 가난한 이웃에 연민의 정을 느끼고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 그러나 복지를 시민적 권리로 규정하는 순간 도덕은 국가의 전유물이요 독점 공급품목이 되고 만다. 일각에서는 기초연금의 재원 문제를 우려한다. 그러나 기초연금의 문제는 재원이나 예산 제약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 철학에 대한 문제다. 국민 대다수로 하여금 공짜 돈을 놓고 투쟁하도록 만드는 것은 거부돼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아찔하게도 정치가 그것을 부추기고 있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부자들에게 더 뜯어 20만원을 30만원으로, 30만원을 50만원으로 올려주겠다는 정치인들이 출현할 것이다. 그런 부도덕한 게임이 시작됐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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